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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누의 신비 [아누이야기] 2. 오컬트화학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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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주나무 댓글 0건 조회 5,688회 작성일 16-06-05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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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719, Vote: 4, Date: 2001/10/10 11:29:00 , IP: 211.219.117.238
글 제 목 [아누이야기] 2. 오컬트화학의 탄생
작 성 자 문성호



2. 오컬트화학의 탄생




Anniebessant3.jpg

  

[애니 베산트 여사와 찰스 웹스터 리드비터]



아일랜드의 자유사상가 


  애니 베산트는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그 자신은 늘 아일랜드 여인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실제로 그의 어머니는 아일랜드 여인이었으며, 아버지도 절반은 아일랜드 혈통이었습니다. 애니 베산트는 매우 뛰어난 직관력과 즉문즉답의 재치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러한 그녀의 매력은 혈통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애니 베산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만, 신앙을 넘어 이해를 구하고자 했던 그녀의 영적인 열망은 교회를 떠나 자유사상가가 되도록 이끌었습니다. 스무 살에 이미 성직자와 결혼을 한 베산트는 아들과 딸을 각각 하나씩 두고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매우 끔찍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며 순교의 영광스러운 순간을 꿈꾸기도 했던 베산트는 남편의 물리적인 학대와 결혼생활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결심합니다. 그런데 독약을 들이키려는 순간 허공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목소리는 “아, 짧은 불행의 기간을 견디지 못하고 순교나 꿈꾸는 소심하고 비겁한 이여”라며 단호하게 꾸짖었는데, 그 목소리가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불쾌하거나 몰인정하게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베산트는 그 즉시 독약이 든 병을 창 밖으로 내던졌으며, 결코 그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산트는 어린 딸을 데리고 남편으로부터 떠났으며, 곧 자유사상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녀는 뛰어난 웅변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지만 종교적 편협함에 대한 비난은 보수적인 그 당시에 많은 반대자를 만들어냅니다. 첫 번째 시련은 피임에 관한 팜플렛을 출판했을 때 찾아왔는데, 피임은 이미 그 당시 다른 출판물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거론되었던 주제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자들이 압력을 넣어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팜플렛을 판매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베산트는 이 일을 출판의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보고 출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녀는 당시 함께 일하던 브래드래프와의 공동 명의로 팜플렛을 재인쇄하고, 법정에 기소되었을 때도 직접 나서서 변론을 했습니다. 그들은 초심에선 패했지만 항소 끝에 승리하였고, 목표를 달성하자 팜플렛의 유통은 정지시켰습니다. 팜플렛을 그녀의 명의로 재출판했던 일은 사람들이 그녀를 ‘피임 운동’과 동일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 소송사건이 끝나자마자 두 번째 소송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녀의 남편이 그녀의 사상을 문제삼으면서 어린 딸의 양육권을 박탈해 가려 한 것입니다. 이번에도 베산트는 모든 법적인 문제와 장애물들에 대처해 가면서 직접 변호에 나섰지만 판결에서는 패했으며, 양육권의 박탈로 큰 비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아이들은 나중에 성년이 되어 어머니의 열렬한 성원자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목소리 


  그 뒤 애니 베산트는 런던대학에서 과학을 공부하였고,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강의도 하였습니다. 페이비언(점진주의자들)협회와도 교류하였으며, 1885년에는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파업을 이끌어 승리하는 등 여성권익의 향상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애니 베산트는 자유사상가로서 품게되는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들에 뭔가 불만족스러운 것이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당시에 유행하던 강신술이라든가 최면 같은 것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비록 그 현상들이 흥미롭기는 했지만 애니 베산트는 그 속에서 사후세계에 대한 명확한 증거나 논리적인 설명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애니 베산트는 두 번째의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데, 런던의 한 사무실에 앉아 진리를 찾는 것에 대해 실망하고 있을 때 또 한 번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그 목소리는 이렇게 묻고 있었습니다. “너는 진리를 배우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겠느냐?” 베산트는 머뭇거리지 않고 즉각적으로 “예, 주님(Yes, Lord)”하고 대답했는데, 그 목소리는 그녀가 자살을 하려던 순간에 들려왔던 목소리와 똑같은 목소리였습니다. 

  불과 며칠 후 한 평론지의 편집자가 베산트에게 어떤 책에 대한 논평을 부탁했는데, 그것은 바로 블라바츠키 여사의 『씨크릿 독트린』이었습니다. 그 편집자는 그의 젊은 스탭들 누구도 두 권으로 된 방대한 분량의 책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베산트만큼은 여기에서 뭔가 끌어낼 수 있을 만큼 이 주제에 빠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베산트는 그 책을 읽는 순간 마치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진리의 통합체가 갑자기 가슴속으로 번쩍이며 파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베산트는 저자와의 인터뷰를 요청했고, 블라바츠키 여사를 보는 첫 순간부터 애니 베산트의 전 생애는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세속의 친구들과도 그녀 스스로 멀어졌고, 그 동안 힘을 기울여왔던 사회운동으로부터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접한 새로운 진리의 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확고하게 세상에 봉사를 하는데 영감을 주었는데, 그것은 과거처럼 세상의 다양한 부조리들에 어설프게 땜질하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지배하는 법칙을 근본에서 다룸으로써 세상의 악을 소거할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베산트는 블라바츠키 여사의 제자가 된 후 곧 모리아 대사와 직접적인 관련을 갖게 되는데, 그가 바로 베산트가 처음 자살을 생각했을 때, 그리고 나중에 사무실에 앉아 실의에 빠져있을 때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목소리의 주인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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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베산트]




인도의 어머니 


  블라바츠키 여사가 사망한 후 2년 뒤에 애니 베산트는 인도로 갑니다. 인도에 도착하기 전부터 베산트는 인도를 ‘어머니 조국’으로 부르곤 했는데, 신지학과 블라바츠키 여사를 알기 전부터 인도를 옹호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베산트는 블라바츠키 여사와 마찬가지로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는 위대한 여행가였지만 주로 인도에 살면서 신지학 활동을 하였는데, 단지 인도인과 함께 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삶을 살았습니다. 

  신지학의 역사에서 애니 베산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큽니다. 블라바츠키 여사 사후 가장 뛰어난 연사와 저자로서 신지학을 대표하였으며, 1907년 올코트 대령이 사망한 후에는 제2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193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신지학 협회를 크게 확장시키는 등 많은 일을 합니다. 그녀가 저술한 신지학 서적만도 50권이 넘습니다. 그러나 많은 인도인들이 베산트 여사를 신지학자가 아닌 정치가, 또는 사회개혁가로서 기억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여사가 인도를 진정으로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인도 근대사에 여러 현저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베산트 여사는 사라져 간 인도의 위대성을 안타까워했으며, 추락한 식민지 인도의 국가적 지위에 대해서 분개하고 인도의 자유를 위해서 투쟁하였습니다. 그녀는 또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권익 신장을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여성의 참정권을 끊임없이 주장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사람들 중 하나라고 믿었던 인도 여성들의 자질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 적은 결코 없었는데, 인도인들은 인도가 다시 되찾아야 할 영광된 모습에 대해 그녀가 연설하는 것을 듣고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베산트 여사는 성의 없는 정부에 대항에 인도의 젊은이들이 점점 폭력과 무정부주의에 이끌리는 것을 보고 1913년에 정치에 뛰어들어 귀중한 시간과 젊은이들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새로운 신문을 발행하고, 정치활동을 시작한지 불과 몇 개월만에 10년 가까이 분열되어 있던 국회를 화합하도록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발표된 두 당파간의 공통 강령은 인도의 자유와 자주를 크게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베산트는 또 인도 언론들에게 정부를 비판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1917년에는 마드라스 식민정부의 탄압을 받기도 했지만, 대중의 강력한 반발로 억압에서 풀려났을 뿐 아니라 그 해 12월에 인도 국민회의의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어서도, 그전까지는 단지 4일의 회의기간만 주재하고 마는 의장의 역할에 안주하지 않고 의장실을 1년 내내 가장 활동적인 곳의 하나로 바꾸어 나가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베산트의 대중적 인기가 언제까지나 지속되지는 않았는데, 그녀는 언제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고 일을 했으며, 대중적 인기를 잃을지라도 정부의 정책이 옳은 것이면 정부를 지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또 그 대상이 정부가 되었건,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민중이 되었건 간에 부조리를 비난하는데 있어서 냉정하였습니다. 어쨌든 정부와 대중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정책은 늘 ‘인도를 위한’ 것이었으며, 대중적인 인기를 잃은 뒤에도 인도를 위한 개혁 운동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정치뿐 아니라 베산트 여사는 1898년 베나레스에 중앙 힌두대학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해서 교육 분야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영국과 미국 등지의 신지학도들이 그 일을 돕기 위해 몰려들었는데, 그 중에는 베산트 여사의 뒤를 이어 후에 신지학협회 3대 회장이 된 아룬데일이 있었으며, 그의 숙모인 프란체스카 아룬데일은 후에 베나레스의 여자대학이 된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이들 학교와 베산트가 설립한 또 다른 교육조직은 인도 교육의 커다란 밑거름이 됩니다. 베산트는 또한 ‘인도의 아들과 딸들’이란 운동과 어린이들을 위한 ‘황금사슬’ 운동을 창시하였으며, 1918년에는 인도 보이스카웃 운동을 창립하였습니다. 단원들은 스카우트의 규칙을 따르면서도 인도의 터번을 두르고 인도 노래를 불렀는데, 후에 베산트 여사는 스카우트의 가장 높은 영예인 ‘은여우’ 작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현재 인도인들은 블라바츠키 여사는 잘 몰라도 베산트 여사는 비교적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의 인도인들은 애니 베산트 여사를 ‘어머니’라고 즐겨 불렀습니다. 때때로 인도의 여자와 남자들이 여사에게 보석과 돈을 가져와서 건네주었는데, 그것은 이 ‘어머니’가 완전한 식별력과 자비 속에서 그들보다 훨씬 더 잘 사용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사는 정부의 탄압을 받을 때 조국 인도의 살아있는 상징이 되었으며, 많은 힌두 여성들은 그녀를 반신(半神)으로까지 추앙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인도를 조국으로 여기고 헌신했던 애니 베산트 여사가 인도의 생활방식이 그녀에게 자연스러웠던 한 가지 이유를 설명한 적이 있는데, 그녀는 전생의 최근 몇 생을 인도에서 살았으며, 특히 그 마지막 생애는 현생과 불과 3년의 간격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베산트는 그 마지막 생의 기억들을 되살려냈는데, 놀랍게도 그녀의 스승인 마하트마의 손녀였다고 합니다. 


에소테릭 스쿨 


  겉으로 드러난 삶이 아무리 파란만장하고 인도인들의 기억 속에 인상을 남기는 것이었다고 해도, 베산트 여사의 진정한 가치는 대중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그녀의 오컬트적인 삶을 언급하지 않고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베산트 여사는 블라바츠키 여사가 사망한 후 2년 뒤에 ‘에소테릭 스쿨’로 알려진 비의 조직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이 조직은 지혜의 마스터들을 따르는 제자도를 실천하였으며, 그때부터 베산트는 수천 명에 이르는 전 세계 신지학협회 회원들의 영적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베산트 여사는 1902년에 프랑스의 스코틀랜드파 프리메이슨단에 합류하여 최고 등급에 해당하는 33등급을 받았으며, 영연방을 위한 최고회의의 대표자이기도 했습니다. 베산트는 또 신지학회가 ‘세계교사’로 지목했던 크리슈나무르티의 양육과도 직접 관련됩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1909년에 열 네 살의 나이로 발탁되어 쿠트후미 대사의 제자가 되었으며, 1910년에는 『대사의 발밑에 엎으려』라는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후에 신지학회와 결별하지만, 죽을 때까지 세상 사람들에게 강연을 하며 많은 영향을 미치는 영적 지도자로 남았습니다. 

  베산트는 또 한편으로 위대한 요기였습니다. 그녀는 초물리적인 영역의 본질을 탐사하기 위해 요가의 능력들을 사용하였으며, 많은 그녀의 저서들도 이런 탐사의 결과 얻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 상당량이 동료였던 찰스 리드비터와의 공동연구로 진행된 것으로, 우리는 또 한 명의 중요한 신지학회 초기 멤버였던 찰스 리드비터에 대해 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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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베산트]



찰스 리드비터 


  애니 베산트와 인연이 깊었던 리드비터는 기이하게도 여사와 같은 해에 태어나서 죽을 때도 단 6개월 사이를 두고 죽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영국의 노산파란트라는 곳이었습니다. 리드비터가 신지학회를 알게 된 것은 베산트 여사보다 5년 정도 앞선 시기였는데, 서른여섯에 한 교회의 목사보로 있을 때 씨네트의 저작들을 통해서 신지학을 접하게 됩니다. 런던 롯지에 입회한 그는, 같은 회원이었던 영매 에쿨던을 통해서 쿠트후미 대사에게 입문을 요청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당시 런던에 들린 블라바츠키 여사를 만난 리드비터는 이듬해 쿠트후미 대사의 제자로 인정되어 블라바츠키 여사와 함께 인도로 가게 되는데, 대사들의 지도를 받아 영능력자가 된 리드비터는 그 후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활동을 합니다. 

  리드비터는 오라를 보는 그의 능력과 직관으로 어린 인재들을 많이 발굴했는데, 아디아르 해변에서 놀고 있는 크리슈나무르티를 발견하여 신지학과 인연을 맺게 한 장본인도 다름 아닌 리드비터였습니다. 1889년에는 그가 ‘불교도 아난타 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던 실론(스리랑카)에서 지나라자다사라는 어린 소년을 데리고 런던에 가는데, 지나라자다사는 나중에 애니 베산트 여사와 아룬데일의 뒤를 이어 제4대 국제신지학협회 회장에 오르게 되며, 『신지학의 제1원리』를 비롯한 다수의 책들도 집필합니다. 바로 애니 베산트와 리드비터가 공동연구로 화학원소들을 조사하여 『오컬트화학』이라는 작품을 완성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 지나라자다사였습니다. 

  이후 리드비터는 17년간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각지에 강연을 하면서 청소년 지도와 저작활동에 몰두하는데, 한때 청소년 지도 중 성(性)처리 문제로 비난받으면서 사람들의 의혹과 반발을 사기도 합니다. 그러나 1907년에 베산트 여사가 신지학국제협회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국제본부에 다시 합류하게 되었으며, 이후 여사와 함께 많은 오컬트 탐구를 정열적으로 행하였습니다. 베산트 여사와 공저로 된 주요 저작들을 발표한 것이나, 크리슈나무르티를 발굴한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리드비터는 베산트 여사가 정치에 입문한 다음 해인 1914년에 호주에 들렀는데, 그만 그 곳을 사랑하게 되어 약 10여 년간을 호주에서 머무릅니다. 1915년에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였으며, 그다음 해에는 자유카톨릭교회의 주교가 되기도 했습니다. 1929년에는 호주를 떠나 국제본부로 돌아왔다가 1934년 다시 호주로 강연을 가는 도중 병을 얻어 호주에서 사망하는데, 그때 그의 나이 여든 일곱이었습니다. 

  리드비터의 저작은 총 30권 정도가 되는데, 『아스트랄계』, 『차크라』, 『투시』, 『데바찬계』, 『꿈』, 『인간, 그 보이는 면과 보이지 않는 면』, 『죽음후의 삶』, 『모나드』, 『상념체』 등 신지학협회 내에서도 비교적 비중 있는 서적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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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디 아니마 


  리드비터의 저작에서도 나타나듯이, 몇몇 신지학자들은 물질계의 장벽을 넘어 초자연계의 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오라는 물론 이른바 에텔계, 아스트랄계, 멘탈계와 같이 물질계의 상위 차원에 해당하는 영역을 투시했는데, 리드비터에 따르면 투시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애니 베산트와 찰스 리드비터가 화학원소를 조사하는데 사용한 투시능력은 현미경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물질을 크게 확대해서 보는 특이한 것이었는데, 이것을 산스크리트어로 ‘아니마’라 합니다. 

  아니마는 요가의 문헌들 속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기원전 400년경에 쓰여진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에는 요가 수련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비범한 능력(싯디)들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3.26절에 요가 수행자는 “초물질적인 능력을 사용하여 작고 숨겨진 것, 또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3.46절에도 “물질 원소에 대한 지배력을 갖게되면 몸을 원자처럼 작게 응축시키거나, 더 이상 물질 요소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 완전한 몸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몸을 원자처럼 작게 응축시킨다는 이야기는 실제로 몸의 크기가 축소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식의 측면’에서 자신에 대한 개념을 매우 극소화하여 정상적으로는 작은 대상이 관찰자에게는 커다란 시각적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인식력은 마치 공간적으로 관찰자 자신이 관찰 대상과 같은 규모의 크기로 축소되었다는 착각을 줍니다. 

  서두에 언급한대로 처음 리드비터에게 이런 독특한 능력을 사용하여 화학원소들을 조사해보라고 권유한 것은 씨네트였습니다. 리드비터가 씨네트의 집에 머물며 동료들에게 투시능력을 시험해 보일 때 씨네트는 리드비터의 능력이 극히 미세한 사물을 확대해 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물질의 원소(분자)를 볼 수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이것이 1895년의 일인데, 리드비터는 애니 베산트와 함께 원소들을 조사하여 그해 11월에 수소와 질소, 산소원자의 그림을 신지학 잡지인 『루시퍼』지에 발표하였습니다. 이후 원자의 구조를 관찰하는 그들의 연구는 38년간이나 계속되었는데, 두 사람 모두 엄청난 활동가였으므로 이 한 작업에만 꾸준하게 매달리지 못하고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다시 재개되곤 하는 식으로 이어졌습니다. 


오컬트화학 


  1909년에는 그 동안 『루시퍼』와 『신지학자』 같은 잡지에 발표했던 연구성과들을 한데 모아 『오컬트화학』이라는 단행본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는 모두 60여종의 원소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이 오늘날 『오컬트화학』 제1판으로 알려져 있는 판본입니다. 1919년에는 『오컬트화학』 두 번째 판이 런던에서 출판되었는데, 달라진 것은 거의 없고 발행자인 씨네트의 서문만 추가되었을 뿐입니다. 심지어 그 동안에 다른 잡지들을 통해서 발표되었던 연구결과들도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리드비터와 애니 베산트가 죽고 20년 가까이 지났을 때, 신지학협회 회장으로 있던 지나라자다사가 과거 모든 연구결과들을 집대성하여 『오컬트화학』 제3판을 출판하였습니다. 현재 그나마 『오컬트화학』 제3판을 복사본으로 구할 수 있을 뿐이고, 제1판과 제2판을 구하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하지만 제3판은 제2판에 비해서 3배 정도 되는 분량인데다 앞선 판들의 내용이 거의 모두 포함되어 있으므로, 전문적으로 『오컬트화학』을 연구하실 분이 아니라면 굳이 초기 판본들을 구하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오컬트화학은 분명 그 연구방법에서 정통과학과 궤를 달리하는 것입니다. 만약 두 연구방법의 결과가 동일하다면, 비록 방법상의 논란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결과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결과가 크게 상이하게 나타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즉 우리는 두 가지 결과 중에 어느 한 가지만이 옳다고 선택을 하고 다른 하나는 배척해야 할 것입니다. 오컬트화학은 어느 쪽일까요? 여기 하나의 예로 수소원자를 보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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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수소원자 모델과 오컬트화학의 수소원자]



  왼쪽의 (a)는 정통과학의 수소원자 모델을 나타낸 것이고, 오른쪽의 (b)는 오컬트화학의 수소원자를 나타낸 것입니다. 물론 왼쪽의 원자모델에서 원형의 궤도로 표현된 전자는 좀 더 정확히 묘사하면 중앙의 원자핵을 둘러싸고 있는 구형의 구름형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동일한 결과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적어도 동일한 결과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거의 모든 분들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실 겁니다. 과학자들에게 물어보면 어떨까요? 아마 여러 흥미로운 답변들이 나올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이 두 원자모델은 서로 같지 않은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오컬트화학과 정통과학을 대하는 두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방금 언급했듯이 두 가지 결과 중 하나를 옳은 것으로 보고 다른 하나는 배척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자세는 오컬트화학과 정통과학 모두 진실을 찾아가는 탐구과정의 중간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비록 지금은 서로 다른 길을 통해 목적지에 가고 있기 때문에 풍경이 달라 보이지만, 언젠가는 두 길이 만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아래 공통점을 찾아나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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