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 (신비의 문) > 오컬트화학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오컬트화학

물질의 궁극원자 아누 프롤로그 2 (신비의 문)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우주나무 댓글 0건 조회 4,410회 작성일 16-06-05 01:33

본문

Read: 695, Vote: 11, Date: 2002/11/29 17:15:00 , IP: 210.123.120.114
글 제 목 [물질의 궁극원자 아누] 프롤로그 2 (신비의 문)
작 성 자 문성호




프롤로그 2 

신비의 문 


“죽는다는 건 무엇일까?” 

문득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영혼에 대해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12살짜리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두려워진 것이다. 

내가 죽게 되면, 나라는 존재는 영영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곧 아무 흔적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이 세상은, 그리고 이 우주는 여전히 굉음을 내며 계속 운행하고 있을 것이 아닌가? 물론 그런 사실을 의식할 나라는 존재는 이미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다. ‘나의 의식’이 생명을 다한 뒤에도, 나의 존재 여부와는 아랑곳없이 작동하고 있을 냉엄한 은하계와 우주를 생각하면, 그 두려움은 공포를 넘어 차라리 경이롭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러한 상상은 12살 어린아이에게 “물질은 영원하지만 의식은 덧없이 초라하고 유한한 것”이라는 철학적인 결론을 내리게 했다. 사실 수많은 목숨의 명멸과는 상관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우주를 상상하기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설사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우주는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인식하지도 못하는 우주가 나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주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고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나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잠시 이 세상에 태어나 티끌 같은 경험을 하고 가지만, 조만간 그 경험조차도 죽음과 동시에 어디론가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과 존재하였다가 곧 무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무에 그리 다르겠는가? 결국 이 우주에서 의식이니 생명이니 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찮고 우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비존재(非存在)에 대한 이런 생각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던지,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공허가 금방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마침내 두려움을 참지 못한 나는 동생들이 있는 방으로 뛰어가 함께 장난을 치며, 이어지는 생각의 고리를 끊어야 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죽음을 극복할 수 없다. 비록 생활수준의 향상과 유아 사망률의 감소, 의료기술의 발전 등으로 평균수명은 연장되었을지 모르지만, 무(無)를 향해 치닫는 운명의 끈질긴 시계 바늘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슬프게도 과학은 영혼을 부정하거나, 최소한 인정하지 않는다. 물질 자체에 생명이 없다고 보면서, 이 생명 없는 물질을 1차적인 것으로, 그리고 마음이라든가 의식, 지성, 생명활동은 2차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생물학이나 심리학 같은 과학 분야들도 생명을 자연의 본질로 다루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한마디로 현대과학은 유물론적 학문인 것이다. 최근 양자역학과 같은 분야에서 기계론적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혁신적인 사고방식의 전환이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그래도 거의 모든 학문 분야가 생명의 본질이나 영혼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는 유물론적인 토대 위에 서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물론 과학은 현대인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었다.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있게 해주었고, 고래처럼 바다 속을 잠수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심지어 대기권 밖으로도 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보이지도 않는 전파를 통해 음성을 주고 받는가하면, 지구 반대편에서도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육체노동의 많은 부분을 기계가 대신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좀 더 편리하게 여러 가지 시설들을 이용하며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과학의 역사를 진보적인 발전의 역사로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과학의 발달로 지식이 늘어나고 그에 따른 기술적 상상력이 풍부해지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 우리의 조상들이 누렸던 신화적인 상상력들은 그 설자리를 잃고 말았다. 예를 들면 화산 속에서는 더 이상 불을 뿜는 용이 살지 않고, 꽃과 나무에도 요정은 살지 않는다. 무선 인터넷이나 투시카메라의 가능성은 믿을지라도, 텔레파시나 투시 같은 초능력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믿음은 주위의 조롱이나 이상한 시선들만 불러모으고 만다. 더욱이 몇천년을 살면서 늙지 않았다는 전설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어렸을 적 할머니에게 들었던,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꿈같은 이야기다.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귀신들의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영화관 밖에서 귀신을 마주칠까봐 겁낼 필요는 없다. 

가만히 살펴보면, 만유인력의 법칙과 에너지보존의 법칙, 질량보존의 법칙, 엔트로피(무질서도) 증가의 법칙, 광속도 불변의 법칙 같은 물리법칙들은 오늘의 과학을 있게 한 위대한 발견들이지만, 동시에 하나같이 자연현상을 규제하고 있는 금지령들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만유인력의 법칙은 물체가 저절로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을 막으며, 에너지보존의 법칙은 한 번의 충전으로 전기자동차가 영구히 도로 위를 굴러다니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고, 질량보존의 법칙은 물질이 새롭게 나타나거나 사라지지 못하게 하여 이를테면 신약성서의 오병이어(五餠二魚)와 같은 기적을 불가능하게 한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아주 먼 미래가 되긴 하겠지만, 언젠가 이 우주가 열평형 상태에 이르러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밋밋한 죽음의 세계가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고, 상대성 이론은 우주선이 빛의 속도를 넘는 것을 금지하여 우리가 항성간 여행을 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런 법칙들이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고 우주가 그 존재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지는 몰라도,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미래의 무한한 잠재력에 막대한 제약을 가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렇게 우리는 과학의 발달로 편리함을 얻은 대신 많은 가능성들을 잃었다. 무엇보다 과학 그 자체가 권위화된 것이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즉 과학의 이론이란 본래부터 가정에 근거한 하나의 가설(假說)이나 추론에 불과한 것이어서, 언제든 새로운 이론으로 대체되는 현상이 실제 과학사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현재의 정설(定說)이라는 것에 과도하게 절대시하여 다른 대안들을 아예 무시하거나 기존 이론을 수호하려는 태도로만 일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창조의 원동력인 많은 상상력들을 억압해온 것이다. 

어쨌든 과학의 신념에 따르면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 때문에 12살 어린 소년 또한 유물론적인 과학문명의 배경 속에서 공포의 눈으로 죽음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2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그때와 달라진 눈으로 세상을 본다. 이제 나는 어린 시절처럼 삶의 한계에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그동안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토대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현대과학의 첨단과 비밀스럽게 전해져온 고대지혜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만남을 중심축으로, 절망과 비극의 세계관으로부터 희망과 마법의 세계관으로 옮겨가는 환상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하고자 한다. 

여러분은 앞으로 신비학(神秘學)이라는 낯선 용어를 자주 접하게 될 것이다. 신비학이란 무엇인가? 분석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에 의존하는 과학과 달리 직관과 계시에 의한 정보와 경험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종교나 신비주의와 비슷한 면도 있지만, 그러나 이 신비학이라는 용어는 그리 간단히 정의 내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사용하는 신비학이라는 용어는 ‘오컬트 과학(Occult Sceince)’이라는 용어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오컬트란 용어의 사전적 의미는 “감추어져 있다”는 뜻으로, 결국 신비학이란 사물의 감추어진 측면을 연구하려는 학문적 노력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오컬트는 영혼을 포함한 인간과 우주의 구조와 기원, 운명, 그리고 작용 등을 모두 포함하는 신비의 지혜를 일컫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예로부터 이어져온 신비 전통의 여러 흐름과 신비학파들의 가르침을 통틀어서 오컬트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오컬트는 인류사의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서구를 비롯한 전세계의 문명사를 배후에서 주도해온 거대한 사상의 흐름이기도 하다. 마치 인체의 혈관이 피부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서도 모든 육체 조직에 영양분을 공급해주듯이, 오컬트도 문화와 예술, 철학, 건축, 종교, 심지어는 과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알게 모르게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오컬트 과학이라는 의미에서의 신비학은 일반적인 의미의 과학과는 많은 점에서 다르지만, 자연의 법칙과 본질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체계적으로 이해하려 한다는 측면에서 분명한 ‘과학(Science)’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신비학은 흔히 말하는 신비주의와는 구별된다. 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는 신비학의 주장들이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이야기로 여겨질 수 있지만, 반대로 신비학의 입장에서 보면 과학이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다. 우주의 실체는 단순한 귀납적 방법이나 기계장치를 이용한 탐사로는 도달할 수 없는 숨겨진 영역 안에 있다는 것이 신비학의 기본 인식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신비학의 주된 차이는, 첫째로 어떤 현상이나 문제에 접근하는 관점에 있고, 두 번째는 연구방법에 있다. 

과학은 물질우주를 생명이나 의식과 별개인 것으로 볼 뿐만 아니라, 개개 현상이나 물질우주 전체를 생명이나 의식과 관련된 어떤 것에도 영향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연구하고 알 수 있는 한정된 실체로 간주하고, 객관적인 실재의 현상과 관련된 문제들을 ‘아래로부터’, 다시 말해 특정 사실로부터 보편 진리를 이끌어내는 귀납적인 방법으로 접근해 들어간다. 인간의 관찰행위가 실험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양자역학의 혁신적인 발견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을 제외한 현대과학과 현대문명의 근간은 아직까지 이런 사고방식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과학은 인간의 통상적인 물질 감각과 능력에 의존하는 기계장치와 관측장비를 써서 자연 현상들을 탐구한다. 따라서 자연의 신비를 얼마나 더 깊이 파헤치는가는 이들 장비의 부단한 개선 및 새로운 장비의 발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반면 신비학은, 모든 실체와 현상이 우주 그 자체와 일체를 이루는 한 ‘위대한 생명’(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이 겉으로 표현된 양상들임을 인정하고 문제를 ‘위로부터’ 접근해 들어간다. 또한 신비학의 연구는 기계장치보다는 의식 확장이나 인간 내면의 능력 계발에 의지하여 모든 현상을 상위차원에서 조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단순한 물질 감각으로 파악되는 사실 이면에 감추어진 실체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사물이나 현상들 간에 존재하는 훨씬 방대하고 깊은 연관성을 찾아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어느 한 쪽을 부정하거나 우월하다고 주장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이 둘은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보인다. 빛과 어둠, 낮과 밤, 산과 계곡, 동양과 서양, 북극과 남극, 남자와 여자 등등, 이 세상은 어느 곳이나 이원성으로 가득 차 있고 양극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빛과 어둠처럼 두 개의 양극은 완전히 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전혀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지만, 사실은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한쪽도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과학과 신비학도 같은 현상을 놓고 하나는 ‘아래’에서 쳐다보고 다른 하나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각의 차이가 존재할 뿐, 서로 배격해야 할 관계는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사물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둘의 협력이 필수적인 게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신비학이 빛과 어둠 이상으로 서로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만 해도 그렇다. 하나는 사후세계를 긍정하고 하나는 사후세계를 부정하는데, 어떻게 아무 모순 없이 사이좋게 양립할 수 있겠는가? 

사물을 한 측면에서만 바라보면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만약에 공중에 떠 있는 피라미드를 밑에서만 바라본다면, 피라미드는 사각형일 것이라고 잘못된 인식을 하기 십상일 것이다. 반대로 위에서만 보면, 아래면도 윗면처럼 뾰족한 사각뿔 형태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할 가능성이 있다. 과학의 역사는 물론이고, 신비학의 역사에 있어서도 사물을 그릇되게 인식했던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잘못된 인식을 서로 바로 잡아주고, 또 다른 오류의 가능성을 줄여주는 것이 두 분야의 협력으로 기대할 수 있는 효과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 한 쪽만이 전적으로 옳다는 사고방식은 이제 버릴 때가 되었다. 

사실 나는 현대과학과 신비학의 정의를 별도로 내리거나 이 둘의 유사성을 학문적으로 규정하는 일,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영역을 조정하는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보다 더 흥미를 끄는 작업은 이 두 분야가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해내고, 이를 바탕으로 자연의 깊은 비밀들을 실질적으로 탐구해가는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현대과학과 신비학 사이에 벌어진 거대한 틈바구니를 이어줄 공통분모로 아누란 요소를 찾아냈다. 나는 아누가 가진 가능성에 매료되었다. 아마 이 책을 읽는 독자 여러분도 나처럼 현재 물리학의 관측한계보다도 1016배(1억 배의 1억 배)나 작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미립자를 매개로 하여 앞으로 현대과학과 신비학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어떤 물질 탐구든 끝까지 밀고 나가다 보면 반드시 형이상학의 영역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형이하학의 영역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우주의 전모를 파악한다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아누는 이 양쪽 영역의 중간에 세워진 문이자 열쇠이다. 이 마법의 문을 열면 또 다른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 문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물질계와 비물질계, 또는 삼차원세계와 고차원세계를 연결하는 일곱 빛깔 무지개 다리이며,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는 토끼굴이자, 마법사 오즈 나라의 에메랄드 성으로 안내하는 노란색 벽돌길이다. 

아누는 많은 물리학자들이 찾고 있는 물리학의 성배(聖杯), 즉 이 우주의 기본 물질, 말하자면 모든 물질의 기본 구성단위이다. 현대과학과 신비학의 결합에 의해 우주 궁극의 신비가 밝혀진다면, 그것은 얼마나 멋진 일이겠는가! 

또 하나 흥분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형태의 원자 구조가 존재한다는 사실인데, 나는 여기에 ‘초원자(超原子)’라는 이름을 붙였다. 게다가 이 초원자는 아주 놀라운 물성(物性)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마치 과거의 연금술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역사상 최고의 이성을 자부하는 시대에 연금술 운운하는 것은 자칫 비난을 면키 어려운 일이다. 이 때문에라도 나는 이 책에 실린 모든 내용이 연금술을 전제로 작업한 것이 아니라, 아누의 신비를 밝히는 과정에서 우연하게 얻어진 결론이었음을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연금술이 가능하다니! 야곱 뵈메나 로버트 플러드, 니콜라스 멜키오르, 하인리히 쿤라트, 존 디, 헨리 코넬리우스 아그리파, 그리고 랑글레 뒤프레스노이 같은 저명한 신비주의자들조차 연금술을 인간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재생의 의미로만 해석하였으며, 물리적인 의미로 연금술을 받아들이는 이들을 ‘비속한 화학’을 행하는 자들이라 하여 배척했는데, 게다가 칼 융은 연금술사들이 실험용기인 알타노르 속에서 보았다고 생각한 것은 그들이 물질에 투사한 자신들의 무의식 세계 그 자체였다는 심리학적인 해석을 내렸다. 하물며 현대인들에게 연금술은 더 이상 일고의 가치도 없는 비지성적 시대의 유물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다. 과연 나는 융의 해석처럼 단지 타오르는 알타노르의 불꽃 속에서 ‘불도마뱀’의 환상을 본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어쨌든 나는 연금술 이야기에서 이 책을 시작하려 한다. 그것은 비록 연금술이 현대인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더라도, ‘영원한 부’와 ‘영원한 생명’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모든 꿈과 희망, 그리고 잠재적인 욕망의 그림자가 그 이면에서 꿈틀대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드라마틱한 주제이자, 이 책의 결말과도 부합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여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원자 속에 감추어진 놀라운 비밀, 물질의 본질과 기원, 그리고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우주의 진실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또 우리는 이 과정에서 영혼과 생명의 신비와도 마주치게 될 것이다. 원자와 아누, 그리고 현대물리학과 신비학이 만나는 지점에서 펼쳐지는 신비스러운 지적 모험의 세계로 우리 모두 용감하게 뛰어들어가 보자.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접속자집계

오늘
4,009
어제
5,612
최대
6,218
전체
1,330,960

그누보드5
Copyright © woojunamu.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