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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 [천계] 천계의 삶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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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주나무 댓글 0건 조회 2,344회 작성일 16-08-02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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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050, Vote: 17, Date: 2005/03/02 16:57:40 , IP: 220.93.126.13
글 제 목 [천계] 천계의 삶의 실체
작 성 자 문성호




4) 천계의 삶의 실체 


내세라는 주제에 대한 신지학적 가르침을 매우 불완전하게 이해한 비판가들은 종종 하위의 천계에 사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 꿈과 환상일 뿐이며 또한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의 행복한 모습을 상상하거나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여 기쁨과 성공으로 풍요로우면 실제로는 잔인한 환영의 희생자가 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것은 정통적인 가르침이 약속하고 있는 이른바 천계의 ‘확고한 객관성’에 거의 부합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반론에 대한 응답은 두 가지이다. 첫째, 우리가 내세의 삶의 문제를 연구하는 경우, 앞에 놓인 두 가지 전제들 중에서 어느 것에 더 기쁜 것인지(무엇보다 그것은 의견의 문제이지만) 알려고 하기보다는 어떤 것이 진실한가에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그 사실들을 보다 완전하게 탐구하면 환상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매우 잘못된 관점에서 문제를 보고 있으며, 사실을 매우 오해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첫 번째 관점에서 보았을 실제적인 사태는 생전에 의식적으로 멘탈계로 이동하는 능력을 개발한 사람의 경우 매우 쉽게 발견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연구하면, 우리의 위대한 창시자이자 스승인 블라바츠키 여사를 통해 지혜의 마스터들이 우리에게 설명한 내용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된 ‘확고한 객관’론이 문제를 즉시 해결해 주고 우리의 정통파 친구들에게 입증 책임을 전환시킨다. 두 번째 점에 대해서 천계의 하위 수준들에서 완전한 진리가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고, 결국 환상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것은 그렇다고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 이 반론을 제기한 사람이 의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하늘의 삶이 물리적 삶보다 환상적이고 무익할 것이라는 감정에 지배되어 있다. 즉 사실과 완전히 반대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다. 

그 계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환경을 만들어내며, 그 때문에 그 계의 극히 작은 일부만을 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틀림없이 이 아래에서도 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세상은 외계의 전체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감각, 지성, 교육 등과 같은 것만이 그렇게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지상에서 사는 동안, 일반인들이 주변의 모든 것을 느끼는 것은 분명히 여러 가지로 매우 잘못된 것, 즉 공허하고,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에텔적, 아스트럴적, 멘탈적 힘 등 그 모든 것 뒤에 놓인 거대한 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는 힘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일까? 그를 둘러싸고 있고, 그가 밟는 모든 단계에서 그가 만나는 난해한 물리적 사실들에 대해서 도대체 그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 진실은 그의 천상의 삶에서처럼 여기에서도 그는 자기가 창조한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도 거기에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 자신의 무지 때문이며, 그가 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계에서는 자신의 상념을 실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인가? 정확히 그렇다. 그것은 실제적인 것이며, 상념계에서는 상념만이 실제적일 수 있다. 거기서 우리는 저 위대한 사실을 알게 되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그럼 어떤 계의 환상이 더 큰 것일까? 그의 상념들은 진정 현실이며 산 사람들에 대해 가장 현저한 결과, 즉 유익한 결과만을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높은 계에서는 오직 사랑스런 상념만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의 삶이 환상이라는 이론은 오해의 결과일 뿐이며, 그 조건과 가능성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를 보여 준다. 진실은 위로 더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하나의 실재에 더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하위의 두 가지 계에서 보낸 이전 부분들의 결과로 간주한다면, 한 사람의 삶의 상위 부분이 얼마나 실재적이고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인가를 초보자들이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최고 이상이 결코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우리의 최고 열망이 이 아래에서 완전한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몇 가지 노력이 헛되이 끝나버리고 유실되는 힘도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하위계에서처럼 상위계에서 잘 유지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이 쏟아낸 많은 상위의 영적 에너지는 지상에서 사는 동안 그에게 반응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상위 원리들이 육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까지 그들은 훨씬 더 미세하고 보다 징밀한 진동에 반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상의 삶에서 비로소 이 모든 방해가 제거되면, 영원한 정의의 법칙이 요구하는 불가피한 반응 속에서 축적된 에너지가 즉시 쏟아진다. 브라우닝이 장엄하게 말한 것처럼. 

선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 과거는, 전처럼 살아나리라 
악은 없고 무지만 있으며, 침묵으로 소리가 들려오네. 
과거의 선은 미래의 선, 악에 대해 더욱 더 선한 것 
지상에서 파괴된 호들(arcs), 하늘에서 완벽하게 둥글고 
우리가 바라고 꿈꾸어 온 모든 선이 살아나리 
외형이 아니라 그 스스로, 미도, 선도, 힘도 아닌 
목소리 떠났으나 훌륭한 가수를 위해 남고 
영원이 한 시간을 확인할 때. 
너무 높은 높이, 지상에선 너무 힘든 영웅 
땅을 떠나 하늘에서 사라진 열정 
연인과 시인이 신께 보낸 음악인가 
그가 한번만 들어도, 우린 듣게 되리라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또 다른 점으로는 자연이 사후의 삶을 조정해 왔던 이 체계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그 자신의 최대한도의 역량으로 실현할 수 있는 상상 가능한 유일한 것이라는 점이다. 만약 천계의 기쁨이 정통파 이론을 따르듯이 특정한 유형일 뿐이라면 그런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경우 들어오는 모든 이들에게 각자의 공과와는 무관하게 사실상 동일하게 보상함으로써 가장 불공정한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명백한 사실은 말할 것도 없이, 그 기쁨에 싫증을 느낄 자가 항상 나타날 것이고, 그 특정한 경향에 대한 흥미가 결핍되거나 또는 필요한 교육을 받지 못하여 그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도 있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다시금, 친척들과 친구들에 대하여 과연 다른 어떤 배려가 동등하게 만족스러울 수 있을까? 만약 고인들이 지상에 있는 친구들의 변화하는 운명을 느낄 수 있다면 그들에게 행복은 불가능할 것이다. 만약 친구들을 만나기 전에 그들에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모르는 채로 그들이 죽는 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고통스럽게 걱정하는 기간이 있게 될 것이며 이는 때때로 몇 년 이상이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그 친구는 많은 경우 큰 변화를 겪은 채로 도착하게 되어 더 이상 공감의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자연에 의해 우리에게 현명하게 제공된 체계에서는 이런 난점들이 모두 배제되어 있다. 인간은 지상에서의 삶의 기간동안 그 자신이 직접 만든 원인으로 천계생활의 기간과 특징 모두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받아 마땅한 정확한 양과 그의 특징에 가장 잘 어울리는 최적의 기쁨을 누릴 뿐이다. 그는 가장 사랑하는 자와 항상 함께 하게 되며 늘 고귀하고 최선의 모습으로 보인다. 반면 어떤 불일치 또는 변화의 흔적도 그들 사이에는 생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로부터 그가 원하는 것을 언제나 정확히 받기 때문이다. 사실의 관점에서 보면 실제로 일어나는 그 조율은 인간의 상상력이 제공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무한히 뛰어나다. 게다가 예상하는 것처럼, 그 의견들 모두는 사람이 최선으로 생각한 것이지만 진실은 신의 상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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