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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학 (블라바츠키, 포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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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주나무 댓글 0건 조회 1,958회 작성일 16-06-04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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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751, Vote: 9, Date: 2002/03/14 14:42:00 , IP: 210.181.113.22
글 제 목 블라바츠키 여사 소개글
작 성 자 sirius (cosmic1004@hanmail.net)



두 권으로 된 씨크릿 독트린의 저자는 1831년 7월 12일 러시아 남부 에카텔리노슬라브( Ektatem Inaslav)에서 출생하였다.

그녀의 부친은 알렉시스 하안로텐스터언(Alexis Ham you rottens tern)장군의 아들 피터 폰 하안(Piter yon Hahn) 대령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유복한 헬레나 파브로브나 돌고로우고프(Dolgoroukof) 공주의 딸 헬레나 데 화데예프(Helena de fadeyev)였다. 하지만 자신의 딸이 11세 때 사망하여 어린 딸 헬레나는 사라토프(Saratov)에 있던 외조모 밑에서 성장하였으며 외조부는 그곳의 지사(知事)였다.

그녀는 분명 특이한 아이였으며, 일찍부터 주변의 다른 아이들보다 총명하였다. 그녀의 조숙한 심령적 역량은 그녀의 친척이나 친구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어떠한 권위도 참지 못했고 깊은 감수성을 지닌 그녀는, 같은 연령의 소녀로서는 보기 드물 만큼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가지 언어에 능하고 훌륭한 피아노 연주자였으며 총명한 화가이기도 했던 그녀는 길들지 않은 말을 두려움 없이 능숙하게 몰았으며, 자신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상당한 정도를 알고 있었다. 매우 일찍부터 그녀는 자기가 무엇인가에 평생토록 헌신해야 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신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인류에 대한 봉사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인 18세에 결혼하였으나 그것은 애정이나 욕망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가정 교사가 그녀의 반골기질(叛骨氣質) 때문에 누구와도 결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놀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정교사는 중년인 니키폴 블라바츠키(Nikifor blavatsky)조차도 그녀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당시 니키폴 블라바츠키는 에리반(Erivan) 지역의 부지사였고 블라바츠키 가문과는 친밀한 사이였다. 이 말을 들은 그녀는 곧 반발하여 사흘만에 니키폴이 청혼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결혼은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행복하지도 않았다. 불과 수개월만에 그녀는 가정에서 도망쳐 아버지가 주는 돈으로 이집트, 그리스, 및 동부 유럽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고장으로 널리 여행하였다.

1851년 그녀는 런던에 있었으며 그녀의 20회 생일에 모리아(Moria) 대사를 만났다. 모리아 대사는 신지학 운동에서 M이라는 약자로 알려져 있다. 대사는 그녀가 해야할 일을 알려 주었으며, 그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의 내적개발과 인류를 위한 사업에 관하여 대사의 지시를 받았다.

1852년 그녀는 모험적인 미국 여행을 한 후 대사가 살고 있는 티베트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시기가 성숙하지 못하여 네팔(Nepal)이상 가지 못하고 말았다.

런던으로 돌아간 그녀는 다시 미국으로 가서 2년여를 보냈다. 다시 일본을 거쳐 인도로 간 그녀는 카쉬밀(Kashimir)과 라다크(Ladakn)를 거쳐 네팔로 들어가는데 성공하였다. 여기서 그녀의 참다운 수련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스승과 3년을 지낸 후 인도로 들어간 그녀는 반란이 일어나서 유럽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그녀는 다시 여행을 떠나는데, 코카사스, 구루지아 및 기타 지역을 여행하였다.

1867년에서 1870년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티베트에 있었으며, 거기서 밀교의 역량을 완성하고 그녀가 말하는 "심리적-육체적 약점"을 청산하였다. 이것은 그녀가 부정적 영매의 흔적을 말끔히 없앴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후 그녀는 다시 이집트, 시리아 및 콘스타치노플등지를 돌아다녔다.

그녀는 오데싸(Odessa)에 체류하던 중 스승으로부터 파리로 가라는 지시를 받고, 다시 뉴욕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아 1873년 7월 7일 미국에 상륙하였다.

1873년 42세의 저자 블라바츠키 부인은 정신적, 지능적, 심령적 능력의 절정기에 있었다. 그녀를 가르친 사람들의 의견에 의하면 그녀는 그들이 마음먹은 사업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어서 신지학("성스러운 지혜(Divtne wisdim)", 역대의 선지자들이 시험하고 검증한 역대 지혜학의 축적을 의미하며 이것은 진리의 본체로서 다수의 종교는 나무 줄기에 대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을 세상에 새롭게 제시하는데 가장 합당한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부과된 임무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기독교와 기타 확고하게 확립된 신앙들의 교조(Dogma)에 도전해야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과학의 교조적인 견해 등을 타파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이중으로 된 지능적 장벽(Mental fortication)에 틈이 갈라지고 있었다. 그것은 미국을 휩쓸고 있던 심령술 때문이었으며, 이 러시아 부인은 자기에게 부여된 과업을 분명히 알아차렸다. "나는 심령술 이론의 오류를 지적하고, 그러한 현상(Phenomena)과 그 실체를 밝히도록 파견되었다."

이러한 목표의 이중성 때문에 그녀는 곧 곤경에 처하였다. 그녀의 놀라운 능력으로 물리적, 육체적 면을 초월하는 심령적 면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녀는 자신을 심령술사라고 자칭하는 한편 태고의 지혜 특히 인간의 7중성을 자세히 가르치는 과정에서 그녀는 심령주의자들의 적대감을 사게 되었다.

뉴욕에서 그녀는 스승들의 인도에 의해 남북 전쟁에 참가했던 미국인 변호사 올코트(H. S. Olcoat) 대령 및 아일랜드계 변호사 저지(W. Q. Judge)와 접촉하게 되었다. 이들 두 사람은 신지학 운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1875년 이들 세 사람은 관심을 가지는 다른 사람들과 "우주를 다스리는 법칙에 관한 지식을 집대성하고 확산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협회를 설립하였다.

그녀는 이 협회를 위하여 신지학이라는 명칭을 선택하였다. 이것은 "성스러운 지혜 혹은 우주에 깔려있는 지혜와 지식의 집적(集積)을 뜻하며, 기원 3세기에 신플라톤 학파가 창안한 용어이다.

신지학 협회(The Theosophical socity)는 이렇게 1875년 11월 17일 뉴욕에서 설립되었으며 후에 그 목표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1. 인종, 신앙, 성, 계층, 혹은 피부색 등의 구별 없이 인류의 보편적 우애의 핵을 이루기 위하여.
2. 비교 종교(Comparative religim), 철학 및 과학의 연구를 북돋기 위하여.
3. 해명되지 않은 자연법칙과 인간의 잠재능력을 탐구하기 위하여.

올콧트 대령을 회장으로, 그리고 블라바츠키 여사가 간사로 선출되었다.

이 새로운 운동의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블라바츠키 여사는 「이시스 언베일드」 (Isis unveiled, 이시스란 농사와 수태(受胎)를 관장하는 고대 이집트의 여신)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이 책에는 "고대와 현대의 과학과 신학의 신비를 푸는 열쇠(Master-key to the mysteries of Ancient and the Theology)"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한편 올코트 대령은 새로운 협회의 조직을 확장하기 위하여 다음 2년간 활동하였다.

「이시스 언베일드」는 1877년 뉴욕에서 출판되어 곧 성공을 거두었다. 신지학 협회는 그 내세운 목표로 인하여 상당한 지지와 반대를 불러일으키며, 급속히 전파되었다. 1878 블라바츠키 여사는 다시 스승의 지시에 의하여 올콧트 대령과 함께 인도로 갔다. 봄베이에 상륙하자 그들은 당시 알라하바드에서 발행되던 「파이오니아(The Pioneer)」의 편집자 씨네트(A. P. Sinnett)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신지학 운동을 후원하던 두 사람의 대사가 인도해주어 씨네트와 교제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1880년으로부터 1884년에 이르는 동안 긴 서신을 주고받게 되었다. 이 서신들은 후에 "씨네트에게 보낸 성자의 편지들(The mabatma letters to A.P.Scnnett)"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씨네트는 이들 편지들을 바탕으로 대사들의 가르침과 그에 대한 이해를 엮어 「비교(秘敎)의 세계(the occult world)」를 1881년에 출판 하였고, 1883년에는 「비전(秘傳) 불교(Esoterric buddism)」를 출판하였다.

「성자들의 편지」와 더불어 이 두 권의 저작은, 블라바츠키 여사의 작품들과 같은 원천으로부터 온 지식으로 넘쳐흐르고 있으며 「씨크릿 독트린」과 함께 잘 연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인도를 여행한 뒤 신지학 협회의 설립자들이 봄베이로 돌아가 1879년 10월 「신지학도(The Theosophist)」 제1호를 발행하였다. 이 출판물은 블라바츠키 여사가 편집을 맡았고 초창기의 원고들은 대사들 자신이 썼다.

1880년 5월 그들은 실론(Ceylon)을 방문하고 공개적으로 "판차실라(Pancha salai)"를 택하였다.

1882년 5월 설립자들은 마드라스(Madras) 부근 아디알(Adyar)에 큰 저택과 토지를 구입하였으며, 이곳은 지금까지 신지학 협회의 본부가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이곳에 정착하여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새로운 롯지들을 설립하기에 노력하는 한편 많은 서신들을 주고받으며 「신지학도」의 간행을 계속 하였다. 올콧트 대령은 설교자 및 치료자로서의 빛나는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실론(Ceylon)에서 그는 불교 부흥에 노력하였으며 1884년 실론 불교도를 위한 청원을 영국 정부에 제출하기 위하여 런던으로 출발하였다.

이 무렵 건강이 악화된 블라바츠키 여사는 많은 격려를 받았으며 탁월한 대화와 해박한 지식 및 뛰어난 영적 능력 등으로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한편 아디알에서는 그녀의 하인 코올롬(Coulomb) 부부에 의해 악의에 찬 중상모략이 급속히 퍼지고 있었다. 1884년 11월 여사가 아디알로 돌아가자 그러한 중상모략은 근거가 없음이 판명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절친했던 이들 부부의 험악한 중상모략은 블라바츠키 여사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 그녀는 과로와 건강 악화로 유럽에 도착하자마자 병상에 쓰러졌다. 그러나 그해 8월 그녀는 독일 월츠버그(Wurzburg)에서 필생의 대작 「씨크릿 독트린(The secret Doctrine)」을 저술하기 시작했으며, 그 개략에 대해서는 바로 뒤에 언급한다. 1886년 그녀는 오스텐데(Ostende)로 거처를 옮겼으며, 다음 해에는 영국 신지학도들이 그녀를 위하여 런던 놀우드(Norwood)에 마련한 작은 집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이 집은 너무 작아 그녀는 다시 노팅힐(Notting Hill)의 란스타운 거리(Lan-down Road) 17번지로 이사했으며 그곳에서 이키발디(Archibald)및 버트람 케이트리(Bertram Keightley)의 도움으로 「씨크릿 독트린」을 완성하여 1887년에 출판하였다. 1887년 그녀는 아디알에서 출판되는 「신지학도」를 관리할 수 없게 되자, 월간 잡지 「루시퍼(Lucifer, 샛별이라는 뜻)」를 창간하였고 그 표지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암흑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기 위하여"라는 잡지를 기획하였다.

1889년 그녀는 다시 거처를 세인트 존스 우드(S.T Johns wood)의 아베뉴 거리(Avenue road) 19번지로 옮기고 거기서 「신지학의 열쇠(The key to Theosophy)」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문답 형식으로 "신지학 협회가 뿌리를 내린 윤리, 과학 및 철학의 연구를 위한 분명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같은 해 그녀는 티베트에서 수련할 때, 마음으로 배운 티베트의 고문서 중에서 선발한 대목들을 번역하여 "몇 분에게 바친다"는 「침묵의 음성(The voice of the silence)」을 출판하였다. 그녀는 1891년 5월8일 아베뉴 거리 19번지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으며 그녀의 유해는 워킹(Working)에서 화장되었다. 신지학 운동의 내력이나 그것이 당시의 종교적 사상에 미친 영향을 여기서 언급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블라바츠키 여사가 그녀의 제자들에게 이상적인 신지학도로서의 모범을 보인 것은 그녀의 모든 개인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진실 되고 충분히 비명(碑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신 앞의 진실을 보라! 깨끗한 생활, 활짝 열려진 마음, 순수한 생각, 진지한 지능, 베일로 가리지 않은 정신적인지, 모든 사람에 대한 우애, 충고와 지도를 주고받을 자세, 스승에 대한 충실한 의무감, 스승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 진리의 명령에 대한 의욕적 복종, 개인적 불의에 대한 용기 있는 인내, 원리의 대담한 선언, 부당하게 공격받는 사람들에 대한 용감한 보호, 성스러운 학문이 말하는 인간의 진화와 완성이라는 이상을 꾸준히 추구하는 것, 이러한 일들은 학도가 성스러운 지혜의 전당으로 올라가는 황금의 계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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