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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학 (블라바츠키, 포웰)

멘탈체 [멘탈체] 15.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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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주나무 댓글 0건 조회 3,991회 작성일 16-07-31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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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 장 

집 중
 



우리가 상념의 메카니즘(작용)과 힘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마음의 통제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이 타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에 미치는 영향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사실상, 상념을 통제하는 것은 영혼의 능력들을 개발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선결 요건이다. 

‘침묵의 목소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은 실재(實在)를 가리는 것이다. 제자로 하여금 그것을 제거하게 하라.” 물론 이것은 마음이 파괴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마음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음이 지배되고 정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훈련하여 사용해야 할 것은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도구이기 때문이다. 

신비학도는, 명백히, 자기 자신이 품게 되는 상념들과 감정들에 관하여 아주 조심을 해야 한다. 일반 사람은 아마도, 감정이 외부적으로 표출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감정을 좀처럼 점검하려들지 않을 것이다; 그가 감정이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낄 때 그 감정에 굴복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신비학도는 아주 다른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 감정들이 그에게서 마음대로 날뛰도록 내버려두는 대신에, 그는 그들을 완벽하게 통제해야만 한다. 이것은 그의 멘탈체를 개발하고 통제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를 위한 첫 단계 중 하나가 마음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만 하는 하나의 도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리하여 신비학도는 감정들과 마음을 모두 정복해야만 한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생각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만 한다. 그리함으로써 잘 훈련된 무사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리 저리 칼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처럼, 그는 자기의 마음을 활용하여 이리저리 생각하거나 마음을 고요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마음을 확고하게 유지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집중력을 획득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멘탈적인 일(WORK)에 대비해서 필요한 예비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이 어떤 것에서 다른 것으로 갑자기 왔다갔다 하도록 하지 않고 또한 보잘 것 없는 상념들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하면서, 꾸준하게 연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산란한 상념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서도, 그들이 마음을 통제하는데 전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상념의 흐름들을 저지할 수가 없다. 그러한 사람들은 진정으로 집중된 상념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리고 초기의 오컬트적인 발달 과정이 일반인들에게 아주 어려운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러한 집중(력)이 완전히 부족한 것, 다시 말해 마음과 의지의 연약함 때문이다. 더군다나 오늘날에는 좋은 상념들 보다 악한 상념들이 더 많이 이리저리 떠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마음과 의지가 연약함으로 인해서, 조금만 조심하고 조금만 노력을 하면 완전히 피할 수 있었던 온갖 종류의 유혹을 그는 쉽게 받게 되는 것이다. 

형태적 측면에서 말하면 집중하는 것은 하나의 지속적인 영상으로 멘탈체를 유지하는 것이고, 생명적 측면에서 보면 자신의 내부에 그 영상을 재현할 수 있도록 이 형태에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마음에 들어오는 다른 모든 인상들을 완전히 무시하면서, 하나의 영상에 의해서 형성된 단 하나의 이미지속에 마음을 계속 머물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의지의 힘인 것이다. 

더욱 간단히 말하면, 집중이란 마음을 하나의 생각에 맞추고 그 생각에 마음을 계속 유지하는데 있다. 

훨씬 더 간단히 말하면, 집중이란 주목하는(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가 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면, 그때 그의 마음은 이미 집중되어 있다.

목센터 혹은 목 챠크람은 고차원적인 청각과 관련 있지만, 또한 주목하는 능력과 밀접히 관련이 있는데, 모든 오컬트 체계에서 그것은 항상 아주 중요하게 생각되고있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제자들은 수년 동안 “아쿠스티코이(Akoustikoi)”라 불리는 단체에 속해 있으면서, 확고한 철학 원리들로 철저하게 가르침을 받을 때까지 ‘위험한 물위로 배를 띄우는 것’(신비 지혜가 아니라 세상에 속한 지식들의 영향을 받는 환경을 말한다)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미스라(Mithra) 신비의 최하위 계층이 “까마귀들(Ravens)”이라는 계층인데, 까마귀나 앵무새처럼 그들은 자신의 들은 것만을 반복하는 것이 허락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프리메이슨은 이와 유사한 것으로, 그 체제내에 E.A 계층을 인정한다. 

말하는 김에, E.A.의 S... 를 사용하는 사람을 돕기 위하여 정묘한(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하는 특별한 부류의 비인간적인 지적 존재들을 부르는 E.A의 s.... 는 정확하고도 적절한 곳에 만들어질 필요성이 있다; 만약 부주의하게 자신이 행하는 것에 신중히 생각도 하지 않고 만들게 되면, 자기가 만든 사실을 알지 못하므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채로 그러한 영향들에 자신을 노출시킬지도 모른다. 그러한 모든 형태들의 “마술(magic)"을 사용할 때, 그는 부주위하게 그의 곁을 지나가게 되는 불쾌한 세력들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신비 학도는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당연히 생기는 결과로―예를 들면 이마살을 찌푸리는 것처럼―신체의 근육이 긴장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긴장은 신체를 피곤하게 할뿐만 아니라, 영적인 힘들이 들어오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신비 학도는 명상중에 또한 일상 생활중에서도 주기적으로 그의 신체에 주의를 기울이고 의도적으로 “긴장을 풀어야한다”. 한 순간이라도 완전히 이완을 하면, 전신이 엄청난 휴식을 취하게 된다는 것은 경험으로 입증될 것이다. 

(집중력이) 강하고 기질이 강한 사람들은 특별히 이완에 주의를 기울여야하고, 이 목적과 관련된 수련들을 일정하게 지속적으로 행하는 것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Annie Payson Call이 지은 ‘휴식을 통한 힘(Power Through Repose)’은 확실히 추천할 만한 최고의 책 중 하나이다. 

집중은 신체적으로 노력하는 문제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하나의 상념으로 빠져드는 순간 마음은 그 상념에 대하여 집중되어 있는 상태다. 집중이란 마음을 어떤 상념에 억지로 지속케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완벽히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그 상념에 계속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신비 학도는, 상념의 자리는 육체의 두뇌에 있지 않고 멘탈체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그러므로 집중은 육체의 두뇌보다는 멘탈체에 관계가 있다. 

이리하여 집중이란 수동적인 상태가 아니고, 반대로 활발하면서도 잘 통제된 능동적인 상태라는 것이 명백하다. 멘탈계에서의 집중은, 물질계에서 도약하기 위하여 근육을 움츠리는 것이나 근육을 계속 팽팽하게 유지하기 위해 힘을 주는 것과 흡사하다. 

실제로 상념을 집중하기 시작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한번에 5분이나 10분을 초과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뇌를 혹사시키기 쉽다. 매우 점진적으로 늘여나가서 시간은 15분, 20분이나 30분으로 연장될 수 있다. 

신비 학도는 뇌에서 멍하고 묵직한(괴로운) 느낌이 들 때까지 결코 집중이나 명상을 계속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멍함과 고통이란 여러 체들의 질료를 변화시키는 노력이 몸이 견디어내는 것보다 더 급속히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위험 신호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보다 상념을 억제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 같다. 이는 아마도 감정이 억제되지 않고 날뛰도록 허용하는 것은 꼴사납다고 가르침을 받아온 반면에, 대개 떠오르는 상념은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내버려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통제하려고 할 때, 그는 자신의 멘탈체에 배인 과거의 습관들과 충돌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아스트럴체의 집단 의식이 소위 욕망 엘리멘탈(Desire-Elemental)을 형성하듯이, 그의 멘탈체에는 멘탈 엘리멘탈(Mental Elemental)이 있다. 이리하여 이 멘탈 엘리멘탈은 모든 것을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왔다갔다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멘탈 엘리멘탈과의 투쟁은 욕망 엘리멘탈과의 투쟁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다. 멘탈 엘리멘탈은 욕망 엘리멘탈보다 진화상에 있어서 훨씬 이전에 해당하는 단계이므로 물질적으로 제한을 가하는 것에는 덜 익숙하다. 결과적으로 그―멘탈 엘리멘탈―은 욕망 엘리멘탈보다 더욱 활발하다. 다시 말해, 더욱 끊임없이 활동적이지만, 욕망 엘리멘탈보다 그 강도는 덜하고 그 결정적인 역할도 덜하다. 

이러므로, 그 멘탈 엘리멘탈을 다루기는 더 쉽지만 우리가 그것을 다루기에는 덜 익숙하다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하여 욕망보다 상념을 통제하는 데 힘이 실제로 훨씬 더 적게 들지만, 그것은 힘을 지속적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다. 

멘탈계에서 마음은 자신의 고유한 활동영역이 있어 자신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마음이 멘탈 엘리멘탈을 완벽하게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은 단지 연습만 하면 되는 반면에, 우리가 욕망 엘리멘탈을 지배할려고 노력할 때는 우리는 마음을 낯선 세계속으로 끌고 내려와서 외부로부터 온 성격이 서로 상반하는 외부인(alien)인 즉 마음이 욕망 엘리멘탈을 지배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에 말한 몇 가지 사실들은 너무나 중요하므로 요점만 간략히 다시 한번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마음을 통제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감정을 통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지만, 우리는 감정 통제에 어느 정도의 연습을 해왔으나, 대개 마음의 통제는 거의 전혀 연습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멘탈적 수련(훈련)은 우리에게 매우 어려운 것 같다. 감정 통제와 마음의 통제 둘 다는 신체를 완전하게 정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일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의 성취도가 아직까지도 주목할 정도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전의 수많은 생 동안에 어느 정도는 육체의 완전한 정복을 훈련했었다. 이 문제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신비학도에게는 분명히 고무적일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면, ‘침묵의 소리(the Voice of the Silence)’에서 이 지구가 신비가에게 알려져 있는 진짜 유일한 지옥이라는 말이 진실이다는 것을, 그는 당연히 절실히 느낄 것이다. 

위에 언급한 말들이 거짓되거나 과장되지 않도록, 신비학도로 하여금 상념의 힘(thought-power)으로 가령 격심한 치통을 추방하는 일―이것 조차도 어떠한 여건하에서는 행해질 수 있다―이 어렵다는 것을 생각해보도록 하라; 상념의 힘에 의하여 우울함, 분노, 질투 또는 어떠한 다른 불쾌한 감정을 추방하는 것이 분명히 훨씬 쉽고, 불쾌하거나 이득이 없는 주제에서 유쾌하거나 유용한 다른 주제로 상념을 돌리거나, 심지어 마음으로 하여금 전혀 작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집중하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을 더욱 자세히 검토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두개의 주요 그룹으로 자연스럽게 나누어 진다. 첫째는 카마 즉 욕망과 관계가 있고, 둘째는 바로 멘탈 질료의 속성 자체와 관련이 있다. 

마음을 통제하는데 있어 그 어려움은 5,000년 전에 아르주나와 스리 크리슈나 사이의 불후의 대화에서 그―아르주나―에 의해 잘 표현 되었다. 

“오! 마두(Madhu)를 제거해버리신 이여! 평온한 상태에 있을 때에 비로소 그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신 이 요가에 대해서, 차분하지 못함 때문에 저는 그 요가의 기반이 확실히 잡힌 것을 보지 못하고 있나이다. 오! 크리슈나여!, 이는 나의 마음이 가만히 있을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충동적이고 강하여 굴복시키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그것을 제어하는 것이 바람만큼이나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크리슈나의 대답도 올바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답은 성공으로 이르는 유일한 방법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오! 힘있게 무장한 자여, 마음은 제어하기 어렵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도다; 그러나 꾸준한 연습과 무심함(無心)으로 마음은 제어될 수 있도다.” 

우리는 위에서 말한 장애에 두 가지 해결책을 역순으로 고찰해보자. 

1. 무심(indifference). ― 이 말은 분명히 카마 혹은 욕망이 마음을 끌어들여 좌우하고 지배하는 능력에 관한 것이다. 제 6장에서 우리는 카마와 마나스의 관계를 자세히 연구했으며, 욕망이 계속적으로 마음을 자극하여 항상 마음을 쾌락의 노예로서 봉사하도록 하는 것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렇게, 마음은 고통을 주는 것을 피할 뿐만 아니라 기쁨을 주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하여금 그 맡은 바 직무로부터 벗어나서 노예 상태로 끌려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감정들을 제어하고 정복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신비 학도가 사소한 감정들로 인해 야기되는 혼란은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과, 신성의 번쩍이는 섬광閃光인 인간이―아직 광물로도 진화하지 못한 ―욕망 엘리멘탈의 지배를 받도록 자신을 내버려두는 것은 결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는 전혀 거리가 먼 행동이라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좋다. 

이 무심(無心)을 성취하여 하나의 집중 수단으로써 활용할 수 있는 주된 방법이 두 가지 있는 것 같다. 이것들을 우리는 (a) 철학적 방법과 (b) 헌신적인 방법으로 부를 수 있다. 

(a) 철학哲學적인 방법The Philosophical Method 

이것은 카마 즉 욕망을 완전히 통제하기 위한 것으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 속박시켜버리는 모든 것에 대한 자신의 자세를 바꾸고 그 태도를 강화시키는데 있다. 이리하여 사람은 외부적으로 오는 것이든 내부로부터 마음에 나타나는 것이든지 간에 모든 대상들에 무관심하게 된다. 본 저자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이 방법은 서구적인 기질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것 같으며, 그 방법이 해결하는 것 보다 더 복잡한 문제를 종종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동양적인 기질을―특성을 대체적으로 적절하게 표현한다면―가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별로 큰 어려움을 야기시키지 않는 것 같다. 그 방법을 명확하고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논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물론 이 책의 범위를 훨씬 벗어나는 것이다. 그 방법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설명하는데는 몇 마디 말이면 충분하다. 

방법적인 체계에 대한 철학적인 원리는 바가바드 기타의 강연 5와 6에 설명되어 있는데, 각각 행위를 포기하는 요가와 자아를 정복하는 요가라 불린다. 

이 체계하에서는, 사람은 “미워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는다; .... 그는 이원성으로부터 자유롭다; ...... 그는 5감이 감각 대상들 사이에 움직이는 것을 지각한다..... 그는 애착을 버리며 모든 행위의 근원을 영원속에 둔다; 그는 마음으로 모든 행위들을 포기한다; .... 그는 학식과 겸손함을 겸비한 브라마나, 암소, 코끼리와 심지어 한 마리 개와 들고양이까지도 동등하게 본다; ... 그는 즐거운 것을 얻을 때 기뻐하지도 않고 불쾌한 것을 얻을 때 슬퍼하지도 않는다; ... 그는 외부의 접촉들에 애착이 없고 자아안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 그는 욕망과 정욕의 힘을 견디어낼 수 있다 ..... 만물과 조화를 이루고... 즐거워하며... 모든 존재들의 행복에 열중하고... 욕망과 정욕으로부터 벗어나있다.” 

“그는 행위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신성이 부여하는) 의무적인 행위를 행한다... (자신에 의해) 형성된 (에고의) 의지는 포기한 채로 명예와 불명예에서 뿐만 아니라 추위와 더위에서 즐거움과 고통속에서도 한결같이 잘 통제되고 평화롭게 있다; ...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 친구들, 적들, 낯선 사람들,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 외국인들과 친척들 또한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도 편애하지 않고 똑같이 대한다; ... 그는 희망과 탐욕으로부터 자유롭다; ... 그는 모든 바람직한 것들을 갈망하는 그 갈망으로부터 자유롭다; ... 그는 바람없이 고요한 곳에 있는 등불과 같다; ... 그는 엄청난 슬픔에 흔들리지 않는다; ... 그는 상상에 의해 생겨나는 모든 욕망들을 단번에 내버린다; ... 마음을 자아(the Self)속에 거주하게 한 후에 ... 조금씩 조금씩 그는 고요함(tranquility)을 얻는다; .... 그는 자아가 모든 존재들 속에 있으며, 모든 존재들이 자아 속에 있는 것을 본다; ... 그는...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위에서 말한 것은 우리가 철학적 방법이라 불렀던 것의 극히 일부분만을 이루고 있다. 사실, 그 방법은 특별히 각 개인에 맞게 그리고 기질의 특수성들에 적합하도록 수정될 수 있고 또한 수정되어야한다. 

그러나 철학적인 방법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어렵고 까다로운 길이다; 그러므로, “또 다른 다르마(dharma)는 (자신에게) 위험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은 보다 덜 과격한 두 번째 방법을 따르게 하라.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설명하겠다. 

(b) 헌신적인 방법 

이 방법에서는 카마 즉, 욕망 또는 애착을 제거하기 보다는 신비학도는 바로 카마의 힘 자체를 사용해서 마음을 안정된 상태에 두게 한다. 이것은 헌신가가 사용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탁월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강한 카마(욕망)을 최고의 상태로 순화시켜, 상대적으로 자신에게 약한 모든 애착을 보잘것 없는 것으로 보고 그의 주의력이 산만하거나 다른 것들로 흘러가지 못하게 한다. 

성격상 헌신적인 사람은 마음을 사랑하는 대상이나 이미지에 고정시킴으로써 자기 목적을 성취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가 그 이미지를 관조(contemplatin)함에 의해서 경험하게 되는 바로 그 즐거움이, 마음을 그 이미지에 계속 고정시키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비록 마음이 어쩔 수 없이 그 이미지로부터 다른 이미지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고 할지라도, 마음은 계속해서 원래의 그 이미지로 되돌아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헌신적인 사람은 상당한 정도의 집중에 이른다. 

헌신가는 자신에게 매력적인(마음이 끌리는) 요소를 사용하는 반면에, 보다 철학적인 성향을 띠는 사람은 어떤 심오한 개념이나 심지어는 문제까지도 그에게는 매력적인 이미지로 여긴다. 이리하여, 그에게는 지적인 흥미 즉 지식에 대한 깊은 욕구가 마음을 다른 것보다는 그것에 집중하게 하는 마력적인 힘을 제공하고 마음을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고정시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에게 유익한 ‘집중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마음으로 집중을 연습하는 것은 마음을 의지의 영향하에 두게 하거나 특정한 때의 기분․감정인 무드로 마음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고 작용은 특정한 목적에 극한(집중)될 것이다. 

그다지 헌신적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위의 방법은 상당히 수정될 수 있다; 사실상 이 수정된 방법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모든 방법 중 아마도 가장 쉬운 방법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행하는 것이 때문이다. 그 방법에서는, 선정된 주제에 매우 흥미를 가지고 몰두하여 모든 다른 상념들은 마음에서부터 사실상 배제된다. 마음은 다소 몰입된 집중상태를 일으킬 수 있도록 매우 열중해야만 한다. 

신비학도는 자유자재로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을 배워야하며, 외부 대상들을 관찰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과 습관을 배양하면 이것을 성공적으로 가장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대상을 선택하여, 다각도로 꼼꼼하고 세밀하게 조사하고 연구해야한다. 자연계에 있는 어떠한 대상도 실제로는 결코 지루하거나 흥미롭지 않은 것은 없다; 만일 어떠한 것이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면, 오히려 자연계에 현현한 것에 대한 경이로움과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부주의와 인식의 부족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상대적으로 초보적인 연습을 어느 정도 마스터하는 것이 심상화―어떤 대상이 육체적인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세세한 부분까지 정확히 그 대상을 마음으로 재현시키는 능력―를 성공시키는데 필요하다. 그리고 정확한 심상화는 어떤 형태들의 오컬트적인 WORK, 예를 들면 의식(儀式)과 같은 데에 필요한 능력이다. 

만일, 어떤 구체적인 대상 대신에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 즉 미덕이 선정되면, 그것은 신비학도의 열성과 헌신을 일깨우게 되고, 이 경우에 있어 집중이란, 주로 감정의 집중이며 마음의 집중은 현저히 줄어든다. 상념보다는 감정에서 우리가 한 점으로 집중되기가 더 쉽다. 왜냐하면 상념이 보다 미묘하고 활동적이기 때문이다. 

명상을 행할 때뿐만 아니라 집중을 행함에 있어서도, 초심자는 채워지지 않은 보잘것없는 많은 욕망들과 생각지도 않은 문제들이 항상 초심자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입을 쩍 벌리고서 도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장애물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억제하거나 억압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그것들을 공정하게 다루어, 그들에게 특정한 시간을 내주어서, 해결할 때까지 다각도로 충분히 생각하는 것이 더 좋은 계획이다. (마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되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내버려두는 것과 같은 우유부단한 성격을 극복할 수 없는 마음은, 명상은 고사하고 집중에 성공할 수가 없다. 

신비학도는 자기의 문제들을 조정하기로 결정을 하고, 자기 자신의 결정들을 준수하여, 그 다음에는 똑같은 문제를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을 반복하지 말아야한다. 이것을 행하는 능력은 실천에 의해서 그리고 결정을 행동으로 옮기는 습관에 의하여 성장하게 된다. 

(2) 끊임없는 연습 

이 말은 멘탈 질료와 멘탈 엘리멘탈 에센스에 다소 내재하고 있는, ‘끊임없는 활동성’이라는 속성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 같다. 그 엘리멘탈 에센스는 어떤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쏜살같이 날아가듯 항상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의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상념들’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질료와 마찬가지로 멘탈 질료는 습관의 법칙들을 따르므로, 끊임없이 연습함으로써 멘탈 질료를 훈련하여, 마침내 ‘끊임없는 활동성’을 제어하는 것이 몸에 배여, 참된 인간 즉 사고자(The Thinker)에 잘 따르는 ‘자발적이고 말 잘 듣는’ 종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겉도는 마음―일관성 없는 마음 상태―을 극복하는 가장 빠르고도 좋은 방법은 물론 의지를 사용하는 것이다. 사실, 어떠한 방법을 선택하더라도, 의지는 어느 정도 사용되어야만 한다. 전적으로 의지의 힘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그리고 의지력이 발달할 수 있는 정도에는 한계가 없다), 다른 사람들은 철학이나 헌신이나 그 밖에 자신들이 독자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어떠한 다른 수단들을 사용하여 그들의 의지력을 보조하고 보완하기를 더 좋아한다. 

물론 자신의 주위에 보호막을 만들어서 외부의 상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영속적으로 사용가능한 안(案)으로써 추천할만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보호막이란 결국에는 단지 (일시적인 용도에 불과한) 목발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보호막이 사용될지라도, 보호막은 ‘정처 없는’ 상념들이 그의 내부로부터 일어나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한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여기저기에 남겨진 ‘아무렇게나 떠돌아 다니는’ 상념들이 외부로부터 침입하는 것을 막을 수는 있다. 

단지 하위 멘탈 질료만이 그러한 보호막을 만드는데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념들이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으며, 또한 (도움을 받기 위해서) 그가 자신의 상념을 그의 스승에게 쏟아낼 때 이 보호막에 의해서 상념이 방해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프리메이슨에서 이와 유사한 과정이 ‘지부의 지붕을 이는 것(Tyling the Lodge)’인데, 물론 이것은 공부가 되는 단계에 적합한 계에서 행해진다. 

집중력은 평범한 일상생황에서 얻어질 수가 있으며 당연히 일상생활 중에서 얻어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든 지간에, 우리는 우리의 주의력을 그 자체에 완전히 집중하고, 전심전력으로 행하고 또 가능한 잘 해야한다. 예를 들면 한 통의 편지도 잘 그리고 정확하게 써야만 하며, 세세한 점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부주의하여 편지를 연기시키거나 그 효과들을 해치지 않도록 해야한다.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완전히 주의를 집중하고 저자가 뜻하는 바를 이해하고 노력하면서 읽어야한다. 어떻게든 마음을 명확하게 훈련하지 않고는 단 하루라도 보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집중력이) 힘을 얻는 것은 바로 연습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항상 그 힘이 약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결국엔 그 힘이 위축되어 버리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근심이 작용하는 메카니즘과 그것을 제거하는 방법을 학생들이 이해해야한다. Work는 지나치지 않다면, 상념 도구를 해치지 않고 반대로 강화시킨다. 그러나 근심이 작용하는 멘탈적인 과정은 분명히 상념 도구를 해치고 잠시 후에는 극도의 신경 피로와 초조함을 야기시키는데, 이로 인하여 지속적인 멘탈적인 활동이 불가능하게 된다. 

근심이란 똑같은 일련의 상념을 약간만 변화를 주면서 계속해서 되풀이 하고, 어떠한 결과도 얻지 못하며, 심지어는 종종 어떤 결과를 목표로도 하지 않는 과정이다. 그것은 의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멘탈체와 두뇌에 의하여 시작되어 의식에 강요되는 상념 형태들이 계속해서 재현되는 것이다. 

사고자(思考者)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므로 불만의 상태에 있다; 예상되는 골치 아픈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는 걱정하며 들뜬 상태에 있게 된다. 사고자에 의해 통제되지 않은 이러한 충동하에서는, 이미 형성되었고 또한 거절당했던 영상들을 멘탈체와 두뇌가 계속해서 위로 방출하(던져 올리)게 된다. 염려하는 상태에서는, 사고자는 그의 여러 체들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에 불과하다. 

근심은 대개 자동현상에 기인하기 때문에, (멘탈) 질료의 바로 그 (자동현상의) 특성은 또한 근심을 극복하는데 활용될 수도 있다. 아마도 “근심을 일으키는 채널”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반대되는 성격의 또 다른 채널을 형성하는 것이다. 명상중에 “자아는 평화이다; 그 자아는 나다. 자아는 힘이다; 그 자아가 나다.”와 같은 그러한 상념에 곰곰이 몰두함으로써, 이것을 할 수 있다. 그가 이렇게 곰곰이 명상할 때, 자신이 곰곰이 명상하고 있는 그 평화가 그를 감쌀 것이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상상했던 그 힘이 그를 가득 채울 것이다. 명상을 위한 개념들을 정확하고 명확하게 형성하는 것이, 물론 특정 개인에게 적합할 수 있다. 

신비학도는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할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자유자재로 그만두는 법도 배워야 한다. 사고 작용이 끝날 때는, 파도에 밀려 계속해서 바위에 부딪히는 보트와 같이, 상념이 ‘아무렇게나 계속해서 떠돌게 내버려두어’ 마음과 부딪히지 않도록, (사고 작용의 결과 남은) 그 상념은 완전히 (마음에서 or 의식에서) 떨어져 나가야 한다. 기계가 물건을 생산하고 있지 않을 때는 기계를 헛돌게 하여 불필요하게 기계를 마모시키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값으로 따질 수없는 마음이란 기계를 계속 헛돌게 하여 유용한 결과도 얻지 못하고 마멸시켜서는 안된다. 피곤한 수족들이 완전히 휴식을 취하면 힘이 소생하듯이, 마음도 완전한 휴식속에서 위안(힘)을 얻을 것이다. 

신비학도는 그의 사고 작용을 끝마칠 때, 그 상념을 내버려야 하며, 그리고 내버리는 바로 그 순간에 또 다른 상념들이 마음에 떠오를 때, 그의 관심을 그것들로부터 다른 데로 돌려야 한다. 

또 다른 방법은―저자가 사용을 하여 성공한 한 방법이다―관심(주의)을 다른 데로 돌리기 보다는 일어나는 상념들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것) 이 방법이 바로 적극적인 행위이다. 
이다. 그들이 오는 대로 내버려두고, 그들에게 전적으로 무심해라. 어떤 새로운 생명이 그 상념들 속으로 부여되지 않게 되면, 잠시 후에 그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어, 우리는 어떠한 종류의 상념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어 완전히 고요한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그 고요함은 아스트럴체와 멘탈체 둘 다에게 극히 편안함을 주게 된다. 

(이 방법은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하여 또한 사용될 수 있다. 저자는 여러 가지 경우에 있어 그것이 엄청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상념의 흐름[사고 작용]을 중단시키는 것은 상위의 여러 계들에서 우리가 활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예비 단계이다. 두뇌가 고요해지는 것을 배울 때, 바로 그때에서야 의식을 물질적인 옷으로부터 철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신비학도는, 요가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수행자가 “사고 원리가 (우리 의식의 지배하에서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는 파탄잘리가 말한 금언의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은 멘탈체 또는 “사고 원리”에 대한 완벽한 통제력을 얻어서, 바로 인간의 본질인 사고자가 신중히 동의함으로써만 그것이 변화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파탄잘리가 요가를 정의하는데 사용된 용어는 치타-브리티-니로다(chitta-vritti-nirodha)인데, 이것은 마음의 질료(chitta)의 소용돌이들(vritti)을 억제(nirodha)한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도구를 자유자재로 다루듯이, 마음을 다룰 수 있어야한다; 그 단계에 이를 때, 그가 완전히 멘탈체로부터 철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이리하여 요가는 멘탈체의 모든 진동들과 변화들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스터의 멘탈체에는, 내부로부터 시작되는 변화를 제외하면, (멘탈체)의 색채 변화가 전혀 없다. 그의 멘탈체의 색채는 “잔잔한 호수 물결위에 비치는 달빛”과 같다. 달빛이 비치는 흰 부분(whiteness)안에는, 모든 색채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지만, 외부 세계에 속한 것은 어떤 것도 지속적으로 비치고 있는 그 광채위에 색조의 변화가 조금이라도 일어나게 할 수가 없다. 그의 멘탈체는 자신이 하위 세계와 의사소통할 필요가 있을 때만 사용하는 외부의 껍질에 불과하다. 

집중의 결과로, 아는 자(the Knower)가 집중된 마음을 가지고 하나의 영상을 꾸준히 숙고할 때, 그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 말로 설명을 들을 때 보다도 그 영상에 대해서 더욱더 완전한 지식을 얻게 된다. 

대상을 말로 설명함으로써 대략적으로 형성된 윤곽은, 그 윤곽속의 전체적인 상황이 (집중된 마음의) 멘탈체에 의해서 형성됨에 따라 그 대상에 대한 그림은 점점 더 세부적으로 충실해진다. 그리고 의식은, 설명된 그 내용들과 더욱더 밀접하게 접촉을 하게 된다. 

집중과 상념의 힘에 관한 이론과 실습을 더욱 세부적으로 연구하기 위하여, 신비학도는 애니 베산트가 지은 ‘상념의 힘, 그 통제와 함양(Thought-Power, Its Control and Culture)’을 참조하라. 그리고 집중에 관한 실제적인 소책자로서는 어네스트 우드가 지은 멋진 책 ‘집중(Concenrtration)’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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