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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경 秘經 [SD] 스탠저 II(분화의 개념)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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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주나무 댓글 0건 조회 2,796회 작성일 16-08-02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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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813, Vote: 9, Date: 2002/05/21 15:17:00 , IP: 211.109.48.141
글 제 목 [SD]스탠저 II(분화의 개념) - 2
작 성 자 sirius (cosmic1004@hanmail.net)




2. . . . . 침묵(정적)은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을 지각할 귀가 있었는가? 없었다! 침묵이나 소리도 없었다(a). 자기 자신을 알지(의식하지) 못하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영원한 숨(운동)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b). 



(a) 사물은 없어져도, 여전히 실재한다는 생각은 동양 심리학에서는 기본적 개념중 하나이다. 이러한 언어의 명백한 모순 속에, 대자연의 진실이 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나타내는 언어의 모순에 관해 의론하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속에서 그 사실을 깨우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와 같은 모순으로 잘 알려져 있는 예는 화학적 결합이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물이 되었을 때, 수소와 산소의 존재여부는 아직도 의론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어떤 사람들은 물이 분해되어버리면, 또다시 수소와 산소로 되어 원모습이 되돌아오기 때문에, 두 원소가 계속 물 속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수소나 산소가 실제로 전혀 다른 것으로 되어 버렸으니까, 일시적으로 이 둘은 없어진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이미 다른 것이 되어버렸지만, 그 자체로서 계속 존재하는 것의 진정한 상태에 대해서는 조금도 이해를 못하고 있다. 물로서의 존재는 산소나 수소에 있어 기체로서의 존재보다는 “더 진실한 존재”인 비존재의 상태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래서, 이것은 “브라흐마의 밤”에 우주가 잠자리에 들고, 즉 존재하지 않게 되고 새로운 만반타라의 새벽에 우주가 다시 존재하게 될 때 다시 깨어나는 우주의 상태를 막연하게나마 상징한다. 

(b) 유일의 실재의 “숨(Breath)”은 태고의 비교에서는 우주발생론의 영적인 면에만 적용되어 사용되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물질계에서는 같은 의미인 운동(Motion)으로 대체되었다. 유일의 영원한 원소 즉, 여러 원소를 포함하고 있는 매체는 어떠한 차원도 없는 공간이다. 그리고 끝없는 계속과 원초의(따라서 불멸의) 물질과 운동(말하자면 “유일“의 원소의 숨인 절대적 “영속운동(永續運動)”)은 공간과 공존한다. 이미 말한바있듯이, 이 숨은 프랄라야(긴 휴식의 밤)의 영원(永遠) 동안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SD1권 2부 "혼돈, 신, 코스모스"참조) 

그러나, 역시 “유일의 실재의 숨”은 유일한 원인 없는 원인, 즉 “전유성(全有性, All Be-ness)"(브라흐마, 즉 우주인 전존재(全存在, All-Being)와 완전히 대조를 이룬다)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브라흐마(또는 하리(Hari)) 즉, 바다에서 지구를 끌어올린 후에 “창조를 해냈다”는 네 가지의 얼굴을 가진 신은, 수단으로서의 원인일 뿐이고, 학자들이 표시했던 것 같은 최고의 원인은 아니다. 창조를 언급하는 푸라나(Purana)의 문절(文節)의 진정한 뜻을 완전히 이해한 동양학자는 지금까지 없는 것 같다. 

이 문절에서 브라흐마는 창조의 일을 하기 위해 후일에 생성되어지는 것들의 잠재력의 원인이다. “그리고 여러 잠재력이 진정한 원인이 되고 난 후에, 그로부터 그것들이 나온다.” (「비쉬누 푸라나」 1권 1장 5절 윌슨 영역 1권, 66p, 프이쉬토와도. 홀에 의한 각주.) 
라고 번역자는 말하지만, “그리고, 그것에서 잠재력이 나온다. 그것들은 물질계에서 진정한 원인이 되어가면서 차츰 창조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 아마 좀더 정확할 것이다. 그 유일한 (원인 없는) 이상적 원인이외에, 세계의 원인이 되는 다른 것은 없다. “수행자들 중에서도 가장 존귀하신 분이시여! 그런 잠재력을 통하여, 즉 그 원인의 잠재력을 통하여, 모든 피 창조물은 생득의 혹은 고유한 성질을 얻었음이라.” 베단타학파와 니아야(Nyāya)학파에서 니미타(nimitta)가 물질적 원인인 우파다나(upādāna) (그리고 상키야(Sānkhya) 철학에서는 프라드하나(pradhāna)는 양자의 기능을 모두 의미한다)와 대조되는 동인(動因)이라면, 이러한 여러 가지의 체계를 조화시키는 비교철학에서 그리고 (아드바이타(Advaita) 베단타학파에 의하여 가장 가깝게 설명되고 있는 것으로서의) 베단타철학에서 우파다나만 사색할 수 있을 뿐이다. 

바이쉬나바 학파(비시쉬타드바이틴스Viśishṭādvaitins) 사람들의 마음속에 실제(파라브라흐만과 이수바라Īśvara)와 대비되는 이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추측 안에는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 아니 아데프트의 이성으로도 생각이 미칠 수 없으며, 이상이라는 그 말조차도 잘못된 용어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알려면 인식될 수가 있는 의식과 지각력이 필요하다. (파라브라훔 외의 어떠한 것도 의식이나 지각력이 제한 받고있다.) 따라서 “스스로를 모르는 영원한 숨(Eternal Breath)”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무한은 유한을 알 수가 없다. 무궁한은 제한된 것과 조건이 붙여진 것들과 관계를 가지는 일은 없다. 

오컬트의 가르침에서는 미지이며 불가지인 운동자, 즉 자존자는 절대적 신성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절대 의식이고, 절대 운동인 것이므로, 묘사할 수 없는 이것을 묘사하는 사람들의 제한된 감각에는, 그것은 무의식이며 부동(不動)인 것이다. 추상적 의식의 속성이 구체적 의식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물의 속성이 습성(濕性)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습성은 물 자체의 속성이며, 다른 물체를 축축하게 하는 원인이다. 의식이란 제한과 조건을 내포하고 있다. 말하자면, 의식의 대상과 의식의 주체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절대의식은, 인식하는 자, 인식되어지는 것들, 인식력을 포함하고 있으며, 셋이 전부 절대의식 속에서는 하나이다. 특정한 순간에 자신의 마음에 떠오르게 되는 부분 이상을 사람은 의식하지 못한다. 언어의 표현력이 아주 빈약하기 때문에 생각을 일으킬 수 없지만, 현재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은 지식과, 기억을 해낼 수 없는 지식을 구별할 수 있는 용어가 우리에게는 없다. 그렇다면 잊어버린다는 것과 기억하지 않고 있다는 말은 같은 뜻으로 되고 만다. 이와 같은 간단한 구별을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면, 추상적 형이상학의 사실이나 차이점을 묘사하거나 구별하는 용어를 찾아내는 것이 더욱 더 어려운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또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외형에 따라 명칭을 붙이고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우리의 유한한 이해력으로는, 절대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절대자를 암흑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절대의식도 틀림없이 그렇다고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절대의식을 무의식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인식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함을 우리들은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면, 무의식적 절대의식과 단순한 무의식을 우리들의 마음속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구별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의식에 상응하고 있지만, 자신의 사고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고급계에서의 뭔가 명확하지 않은 특성을 무의식적 절대의식에 속해 있는 것으로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이 무의식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구별될 수 있는 그러한 의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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