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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경 秘經 [SD] 스탠저 Ⅰ(우주의 밤)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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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주나무 댓글 0건 조회 2,564회 작성일 16-08-02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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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913, Vote: 9, Date: 2002/03/31 14:32:00 , IP: 210.181.109.226
글 제 목 [SD]스탠저 Ⅰ(우주의 밤) - 9
작 성 자 sirius (cosmic1004@hanmail.net)




9. 그러나 우주의 "알라야(Alaya)"(모든 것들의 기초로서의 영혼, 아니마 문디Anima Mundi)가 "파라마르타(Param rtha)"(a) (절대적 비존재와 무의식인 절대적 존재와 절대적 의식)안에 있고, 대차륜(大車輪)이 "아누파다카(Anup daka)"였을때, 당마는 어디에 있었던가(b)? 


(a) 여기에 몇 세기 동안에 걸쳐, 학자들간에 논쟁의 쟁점이 되었던 주제가 있다. 알라야와 파라마르타, 이 용어는 다른 어떤 신비용어보다도 학파를 분열시키고, 더욱 다양한 측면으로 진리를 세분시켜왔다. 알라야란 글자 그대로 "세계의 혼" 즉, 아니마 문디이고, 에머슨(Emerson)씨가 말하는 오버 소울(Oversoul)이다. 비교에 의하면, 이것은 주기적으로 그 성질이 바뀐다. 인간이나 우주의 신(디야니-붓다)들도 이를 수 없는 세계에서 알라야의 내면의 본질은 영원 불변한 것이지만, 우리들이 살고있는 세계를 포함해 저급계의 활동적 생명기간 동안에는 변화한다. 그 동안은 디야니-붓다들은 혼과 본질에 있어서 알라야와 일체일 뿐만 아니라, 요가(신비적 명상)를 일구어낸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혼을 알라야에 녹아들게 할 수가 있다.(무착(無着) 즉, 아리야상가( ry sa ga), 부마파(Bumapa) 학파(편주13)). 이것은 열반은 아니며, 열반 전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의견의 차이가 생겨난 것이다. 대승불교의 요가차리야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알라야는 공(空)의 구현이기는 하지만, 알라야(티베트어에서는 Nying-po와 Tsang)는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의 일절의 기초이다. 또 그의 원질은 영원불변한 것이고, "깨끗하며 조용한 수면에 비추어지는 달처럼", 우주의 모든 것들에 자신을 그려낸다고 말하지만, 다른 학파에서는 이것에 반론한다. 

파라마르타(Param rtha)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요가차리야파는 다른 것들에 의존하는 것들(파라탄트라paratantra)로서 파라마르타를 설명한다. 마드야미카(M dhyamika)파에서는, 파라마르타는 파라니쉬판나, 즉 절대적 완성에 한정되어져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네 개의 진리중) "두 개의 진리"를 설명할 때 요가차리야파는 (아무튼 이 현상계에서는) 삼브리티사트야(Sa v itisatya) 즉, 상대적 진리만이 존재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드야미카파는 파라마르타 사트야 즉, 절대진리의 존재를 가르친다. "오! 탁발승이여, 아라한은 파라니르바나와 일체를 이루어낼 때까지는 절대 지식에 이를 수는 없는 것이다. 파리칼피타(Parikalpita, 偏計所執)와 파라탄트라(Paratantra)는 그들의 두 개의 대적(大敵)이다." 파리칼피타(티베트어로는 Kun-tag)는, 모든 것들이 공함과 환영적 성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범하게 되는 잘못이다. 말하자면 그는 무아(無我)의 것들이 실재하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파라탄트라란 무엇이든 간에, 종속적 관계 또는 인과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하고, 그 원인이 제거되기가 무섭게 소멸되어 버리고 만다고 한다. 예로서 촛불의 심지에서 나오는 빛을 들 수 있다. 심지를 짤라버리거나 불을 꺼버리면 빛은 사라진다. 

비교철학에서는 모든 것들이 살아있고 의식이 있는 것이지만, 인간의 생명이나 의식과 같은 것은 아니고, 동물의 것들과도 다르다고 가르친다. 우리들은 생명이란 소위 물질 속에 나타나 있는 "존재의 유일한 형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에 관해 말하면, 우리들은 생명을 영, 혼, 물질로 잘못 나누어 버린다. 물질은 이 존재계에서 혼이 나타나기 위한 매체이고, 또한 혼은 더 높은 계의 영을 나타내기 위한 매체인 것이다. 

그리고 이 셋은 각기 편만해 있는 생명에 의해 총합된 삼위일체이다. 보편적 생명이라는 개념은, 금세기에 인류의 마인드로 차츰 되돌아오고 있는 고대의 개념의 하나이다. 

그것은 인류의 마인드가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적 신학에서 해방된 결과이다. 과학이 우주생명의 흔적을 탐구하거나 가정하는 데에 만족하여 아니마 문디(!)라고 속삭이며 말할 정도로 용기도 못 가진 것은 사실이다. "결정체(結晶體)의 생명"이란 생각은 지금의 과학에서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반세기전이면 어림없는 것으로 무시되었을 것이다. 식물학자들은 요즘 식물의 신경을 탐구하고 있다. 그들은 식물이 동물처럼 느끼고 생각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식물생명에도 신경이 동물생명에 대해 가지는 관계와 같이 기능적으로 같은 어떤 구조가 식물의 성장과 영양을 설명하는데 있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편주14) 원자이거나, 혹성이거나, 생명을 가진 것은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과학은 힘이나 에너지라는 언어를 써서 자기기만을 해왔지만 그 사실들을 부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됐다. 
그러나 '내적인 비교학파의 신념이란 무엇인가'라고 독자는 물어볼는지 모른다. 이 문제에 관하여, 대체 어떤 가르침이 비교적 불교도에 의하여 가르쳐 지고 있는 것일까? 그들에 있어서 알라야에는 이중적 심지어는 삼중의 뜻도 있다. 대승불교의 요가차리야의 사상에서 알라야는 우주혼(아니마 문디)이기도하고, 진보를 이루어낸 아데프트의 자아이기도 하다. "요가에 능숙한 사람은, 실재의 진정한 성질을 명상하는 것에 의해 자신의 알라야를 마음대로 끌어낼 수 있다." 알라야는 "절대적, 또한 영원히 존재한다"고 용수(龍樹)(나가르쥬나)의 큰 라이벌인, 무착(無着)(아리야상가)은 말한다. 어느 뜻에서는 그것은 프라드하나(Pradh na)인 것이다. 그것을 「비쉬누 푸라나」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전개되지 않은 상태의 원인이 되는 것은, 가장 훌륭한 성자들에 의해 프라드하나, 즉 근원적 토대라고 확실히 불리고 있다. 그것은 정묘한 프라크리티(Prak iti)에 해당하는 최초의 기초이고, 영원한 것이며, 있는 것(즉, 만물을 포함하는 것)이면서 또한 없는 것, 또는 단순한 과정이다. 

그러나, 프라크리티는 부정확한 용어이며 알라야 쪽이 좀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프라크리티는 "지각하지 못하는 브라흐마"는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마 문디 즉, 유일의 생명 또는 보편적 혼을 아낙사고라스(Anaxagoras)에 의해, 또는 그의 시대에 처음으로 가르쳐졌다는 주장은, 인류의 여러 인종의 요람기에서부터 오컬트의 가르침이 보편적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과 특히 "태고의 대계시"라는 생각 그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학자들의 잘못에서 나온 것이다. 

아낙사고라스는 맹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원자라는 현교적 이론에 따른 데모크리투스의 우주론이 너무나도 유물적인 개념인 것이라, 그것에 반대하기 위해서 그런 가르침을 널리 공개했었던 것이다. 아낙사고라스는 플라톤처럼, 그 가르침의 창시자가 아니고 전달자에 불과하였다. 그가 "세계의 지성"이라 말했던 노우즈(Nous), 그의 견해에 의한다면, 전적으로 물질에서 떨어져 나와 해방되어있고, 의도(意圖)를 가지고 활동하는 원질은 인도에서 기원전 5세기 훨씬 이전에, 운동, 유일의 생명, 지바트마(J v tma)라고 말해지고 있었다. 아리아의 철학자만은, 그들에 있어서 무한의 것인 그 원리에 사고작용의 유한한 속성을 결코 부여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말해가다 보면 당연히 헤겔(Hegel)과 독일 초월론자의 절대정신에 이르게 된다. 그들과 인도철학을 대비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다. 쉐링(Schelling)과 피히테(Fichte)의 학파는 절대적 원리라고 말하는 원래의 개념에서 많이 벗어나서 베단타 학파의 기본적 개념의 일면만을 그려냈다. 폰 하르트만(von Hartmann)이 염세적인 무의식철학 안에 어설프게 나타낸 절대정신(Absolute Geist)조차, 아마 서구인들의 사색에 의하여 힌두의 아드와이티(Adwaitee)의 교의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것이지만, 마찬가지로 실체와는 아주 동떨어져 있다. 

헤겔에 의하면, 무의식자는 뚜렷한 자의식을 얻는 것을 기대해보는 것 외에는, 우주를 진화시키는 엄청나고 어려운 일을 결코 할 수 없다. 이것에 관련해서 서구인의 범신론자들은 파라브라흐만(Parabrahman)과 같은 것으로, 무의식으로서 영을 말하고 있지만, 그들이 영이라고 말하는 용어는 보통의 뜻으로 쓰고 있는 것이 아님을 새겨두어야 한다. 무의식이란 용어에는 심오한 신비를 상징하는데 있어 보다 적당한 말이 없기 때문에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현상의 배후에 자리하고 있는 절대의식을 무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첫째로 인격적 요소가 전혀 없고, 인간의 개념작용을 초월해있기에 그렇게 부른다. 현상을 경험함으로써만 개념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는, 자신의 심신의 구조만으로 절대자의 장엄함을 덮어 싸고 있는 베일을 걷어올리기에는 너무 무력하다. 

해탈을 이루어낸 영들만이 겨우 자신이 어디에서 생겨났고 최종적으로 어디로 뒤돌아가야 하는가, 그의 근원의 성질을 미약하게나마 이해할 수가 있다. . . . . . 그렇기는 하지만, 최고의 디야니-초한일지라도 절대적 실재의 외경심을 일으키게 하는 신비의 앞에서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함과 더불어 머리를 숙일 도리밖에 없다. 그래서 의식적 존재가 최고의 경지에 도달(피히테의 말을 빌리자면 "보편의식에다 개인의식이 용해되는 것")할 때조차도, 유한 자는 무한 자를 생각해낼 수 없고, 자신의 정신적 경험의 기준을 무한 자에 맞추어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무의식자"와 절대자가 분명한 자의식을 얻어내 보겠다고 하는 충동이나 기대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베단타 학파는 헤겔학파의 이러한 생각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생각은 눈을 뜬 마하트, 말하자면 변화하지 않은 절대자의 최초의 한 측면으로서 현상계에 이미 투사된 우주마인드에 완전히 적용되지만, 절대자 자체에는 결코 적용될 수 없다고 오컬티스트는 말한다. "영과 물질 또는 푸루샤(Purusha)와 프라크리티(Prakriti)는 유일무이한 존재의 원초의 두 가지 측면에 불과하다"고 우리들은 가르침을 받고있다. 

물질을 움직이게 하는 누우스(Nous), 즉 생명을 주는 혼은 모든 원자 안에 있고, 인간으로서 나타나고, 돌 안에서는 잠재해 있으며, 각각에 알맞은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대자연 전체에는 영-혼이 편만해 있다고 말하는 범신론적 생각은 모든 철학적 개념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아루케우스(Archaeus)는 파라셀수스나 그의 제자 반 헬몬트(van Helmont)가 발견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아르케우스는 고대철학에 나오는 아루케우스 즉, "아버지-에테르"(무수한 생명현상을 현현시킨 기초와 근원)가 한정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무수한 추측은 모두가 이 주제의 변주곡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주음(主音)은 시초의 대계시안에서 연주되고 있다.(Part Ⅱ "원초적 질료"를 보라) 

(b) 아누파다카(Anup daka)는 "어버이가 없는" 혹은 "선조가 없는"의 뜻으로, 철학적으로는 몇 개의 의미를 가진 신비적인 용어이다. 이 이름은 천상의 존재들인 디야니-초한이나 디야니-붓다에게 일반적으로 붙인다. 그러나 이들은 마누쉬-(M nushi, 인간)붓다로 알려진 화신한 붓다와 보디사트바에 신비적으로는 상응하기 때문에, 일단 전인격이 제 6원질과 제7 원질의 합성을 이룬 원질 즉, 아트마-붓디( tma-Buddhi)에 녹아 들어가고, 금강혼을 지닌자(바즈라사트바(Vajra-sattvas, 금강살타))로서 완전한 마하트마를 이루게되면, 인간 불타도 아누파다카라고 부르게 된다. "숨어 계시는 주(Sangbtai dag-po)", 즉 "절대자와 융합한 자"는 자존하고, 스바바바트(Svabhavat)의 최고의 측면인 보편적 영(스바얌부Svayambh )과 일체이기 때문에, 어버이가 없다. 아누파다카의 하이어라키의 신비는 위대한 것이다. 그 정점에는 보편적 영-혼이고, 더 낮은 단계는 마누쉬 붓다이다. 또, 영혼을 지니고 있는 모든 인간은 잠재 상태에서는 아누파다카인 것이다. 따라서 건설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전의 형상이 없는, 영원하며 절대적인 상태에 있는 우주에 관해서 말을 한다면, "우주는 아누파타카였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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