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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제 블라바츠키 여사와 신지학회의 설립 (신지학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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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주나무 댓글 0건 조회 5,180회 작성일 16-06-03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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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누의 신비"에서 발췌한 신지학 관련 설명 세 번째입니다.


어린 헬레나



당시 블라바츠키 여사는 스무 살로 런던에 있었는데, 열일곱에 조국 러시아를 떠나서 세계 각지를 여행하던 중 런던에 도착한지 하루만의 일이었습니다. 블라바츠키는 거리에서 몇 명의 인도왕자들과 함께 지나가던 키가 큰 힌두인을 보았는데, 그를 보자마자 과거에 그녀가 아스트랄 형체로 보아왔던 바로 그 사람임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 말은 비록 블라바츠키 여사가 직접 모리아 대사를 육체와 육체로 마주친 것은 런던에서의 일이 처음일지라도, 과거에 비물질적인 방법으로 그를 본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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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 파데예프(Helena Andreevna Fadeev)]


사실 블라바츠키는 어려서부터 특별한 아이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령으로서 장군의 아들이었고, 어머니 헬레나 파데예프는 유명한 소설가였습니다. 그녀의 외할머니는 공주였는데, 식물학자이자 작가로서도 명성이 높았습니다. 헬레나, 즉 블라바츠키는 태어났을 때 너무 약해서 살아남을 것 같지 않았다고 합니다. 원죄를 지닌 채 죽으면 안 되므로 태어나자마자 세례식을 거행했는데, 세례식을 집행하던 사제의 예복에 불길이 붙는 사건이 발생하여 여러 사람이 화상을 당하는 불길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머니는 헬레나가 11살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는데, 헬레나가 다른 여성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며, 큰 고통을 받게 될 것이 틀림없다고 크게 걱정하였습니다. 어머니는 헬레나에게 닥칠 불행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헬레나는 총명하고 책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어려서부터 심령적 능력을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종종 그런 보이지 않는 존재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으며, 오래된 과거의 환상을 보는 등 여하간 온갖 신비로운 일들로 가득 찼던 모양입니다.

성격도 다른 아이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는데, 풍부한 상상력과 미지의 것에 대한 호기심, 뛰어난 감수성, 그리고 자유와 독립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다른 사람들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또 그녀는 신경질적이고 다혈질이었으며, 고집이 세고 모든 일에 도전적이었습니다.

헬레나가 열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하게 된 것도, 가정교사가 그녀의 반골기질 때문에 어느 누구와도 결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놀렸기 때문입니다. 가정교사가 중년의 니키포 블라바츠키조차도 그녀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자, 헬레나는 사흘 만에 그에게 청혼하였다가 결국 실제로 결혼을 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이런 결혼이 결코 행복할 리도 없었고,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뿐더러, 한 남자를 평생 주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끔찍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헬레나는 불과 수개월 만에 가정에서 도망쳐, 아버지가 부쳐주는 돈으로 터키와 이집트, 그리스, 동부 유럽 등지를 떠돌아 다녔습니다.


대사들과의 만남



블라바츠키 여사는 어릴 때 위기의 순간마다 찾아와 자신을 구해주는 아스트랄 형체를 종종 보곤 했는데, 바로 그가 모리아 대사였던 겁니다. 블라바츠키는 이 아스트랄 형체를 수호천사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런던에서 모리아 대사를 보았을 때 블라바츠키는 곧장 그에게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대사가 그녀에게 움직이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블라바츠키는 그가 지나가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습니다.

그 다음 날 블라바츠키가 전날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기 위해 홀로 하이드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을 때 모리아 대사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모리아 대사는 인간의 내면 계발과 인류를 위한 학회의 결성에 관해 설명하면서 블라바츠키가 창립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블라바츠키가 겪어야 할 어려움과 고통에 대해서도 말해주었고, 이 중요한 임무의 수행을 위해 3년간 티벳에 가서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도 말해주었습니다. 블라바츠키는 곧 그 제의를 받아들여 런던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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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아 대사와 듀알컬 대사가 그림에 묘사된 티벳의 라빈 계곡]



우여곡절 끝에 블라바츠키 여사는 티벳으로 가서 대사와 함께 3년을 지냅니다. 그 후 인도와 유럽을 거쳐 러시아로 돌아온 블라바츠키는 2년 정도를 가족과 함께 보내고, 다시 여동생과 함께 조부모가 있는 코카서스 지방으로 떠납니다. 이 기간 동안에 과거 여행의 후유증으로 중병을 앓기도 했는데, 그녀의 심령 능력은 더욱 향상되어 이제는 그 힘들을 완전히 능동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끔 되었습니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1865년에 다시 러시아를 떠나 발칸 반도와 그리스, 이집트, 시리아,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였습니다. 이때 가족들은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 블라바츠키의 생사를 알지 못하여 크게 근심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죽었다고 포기하는 순간 그녀의 이모가 쿠트후미라고 부르는 대사로부터 헬레나의 편지를 전달받습니다. 쿠트후미 대사는 편지를 전달하자마자 이모의 눈앞에서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렸는데, 기독교를 믿는 이모도 마하트마의 존재만은 의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1867년에서 1870년까지 티베트에 있었으며, 거기서 밀교의 역량을 완성하고 그녀가 말하는 ‘심리적-육체적 약점’을 청산하였는데, 이것은 그녀가 부정적 영매의 흔적을 말끔히 없앴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후 그녀는 다시 이집트와 시리아, 콘스탄티노플 등지를 돌아다닙니다.


신지학회의 설립



1873년에 블라바츠키 여사는 뉴욕으로 가라는 대사의 지시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이때 마흔 두 살의 블라바츠키 여사는 영적, 오컬트적 능력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에 이르렀는데, 마하트마들은 그녀야말로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계획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습니다. 마하트마들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성스러운 지혜(Theosophia)를 새롭게 세상에 알리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각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서 검증하고 확인한 축적된 지혜’이자 진리의 나무로서,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 나무의 가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1874년에 헨리 올코트 대령을 만나게 됩니다. 올코트는 남북전쟁에서 대령까지 진급하였고, 링컨 대통령 암살사건의 수사책임자로도 이름이 알려졌으며, 블라바츠키를 만날 당시에는 뉴욕에서 법조계 일을 하면서 동시에 언론인 역할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강신술’이 사람들 사이에 매우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는데, 이러한 심령주의는 교조적인 신앙과 다윈의 진화론 같은 물질주의에 대한 반발이 그 부분적인 원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고 철학적인 기반이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강신술을 심령현상의 실재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강신술의 오류와 잘못을 지적하고 올바른 영의 실체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습니다.

블라바츠키와 여사와 올코트 대령은 유령의 육화현상으로 유명했던 버몬트의 치텐덴이라는 곳에서 만나 곧 친구가 되었습니다. 모든 일에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냉철하게 접근했던 올코트 대령은 블라바츠키를 통해 그가 갖고 있던 심령주의나 동양의 비의주의(esotericism)에 대한 견해에 일대 변화를 일으킵니다. 1875년에는 올코트 대령의 소개로 젊은 아일랜드계 변호사인 윌리암 콴 젓지가 블라바츠키와 만나게 되고, 이윽고 이들 세 사람은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에 관한 지식을 집대성하고 확산시키기 위하여’ 이에 관심을 가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협회를 설립합니다. 그들은 이 협회를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명칭을 따라서 ‘신지학회(Theosophical Society)’라고 명명하고, 올코트 대령이 회장으로, 그리고 블라바츠키 여사를 간사로 임명하였습니다. 이 초기 모임의 회원 중에는 토마스 에디슨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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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바츠키 여사와 올코트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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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콴 젓지]



다양한 동양의 여러 종교와 신비주의, 현대과학, 미국 심령주의 등을 섭렵한 블라바츠키는 곧 2천 페이지에 달하는 『베일 벗은 이시스』를 집필하여 신지학의 기본을 펼쳐 보였습니다. 『베일 벗은 이시스』는 1877년 뉴욕에서 출판되어 성공을 거두었으며, 신지학 운동은 지지와 반대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며 급속히 전파되었습니다. 


인도와 유럽으로



1878년에 블라바츠키 여사와 올코트 대령은 미국내 신지학협회 일을 윌리엄 젓지에게 일임하고 인도로 갑니다. 올코트는 강연활동을 하며 곳곳에 신지학회 지부를 창설하였으며, 블라바츠키 여사 역시 이름 있는 명사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인도로 건너가자마자 마하트마들의 인도로 인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국신문의 편집자이자 심령주의를 신봉해 왔던 씨네트와 교류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씨네트는 마하트마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게 됩니다. 이 편지들은 나중에 『씨네트에게 보낸 마하트마의 편지들』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며, 1883년에 씨네트가 펴낸 『비전불교』의 바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1879년에는 봄베이에서 『신지학자(The Theosophist)』라는 정기간행물이 발간되었는데, 초창기의 원고들은 마하트마들이 직접 쓰기도 했습니다.

1880년에 블라바츠키 여사와 올코트 대령은 실론(지금의 스리랑카)을 처음으로 방문했는데, 특히 올코트 대령은 그 후로도 수차례 실론을 방문하며 불교의 중흥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습니다. 현재 세계 각국에서 쓰이고 있는 불교깃발도 올코트가 실론의 고승을 도와 디자인한 것입니다.

한편 신지학 협회는 1882년에 마드라스 근교의 아디아르로 이전하였으며, 이곳은 지금도 신지학 협회의 본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884년에는 두 사람이 아디아르를 떠나있는 동안 영국심령학회와 블라바츠키 여사의 하인이었던 쿨롱 부부의 중상모략으로 블라바츠키의 명예에 커다란 상처를 주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올코트 대령과도 사이가 멀어지고 건강까지 악화된 블라바츠키 여사는 1885년에 유럽으로 떠나게 됩니다. 독일을 거쳐 런던으로 간 블라바츠키 여사는 그러나 다시 한 번 정열을 불태워 『베일 벗은 이시스』를 뛰어넘는 필생의 대작인 『비교』를 1888년에 발표하고 이어 『신지학의 열쇠』, 『침묵의 음성』등을 출판했으며, 새로운 신지학 잡지인 『루시퍼』를 창간하는 등 끊임없는 저력을 보여줬습니다. 『비교』 역시 『베일 벗은 이시스』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으며, 1891년 블라바츠키가 숨을 거두기까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를 비롯한 많은 지성인들이 런던에 있는 그녀의 사랑방에 드나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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