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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삶 [헌신의 길] 헌신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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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주나무 댓글 0건 조회 2,643회 작성일 16-07-30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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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헌신의 가치 



헌신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며, 어떻게 헌신이 증진될 수 있는지를 알면, 우리는 헌신에 참여하기위한 동기를 발견할 수 있게끔 그 가치를 적절히 측정할 수 있다. 

헌신은 헌신자를 그들이 사랑하는 존재와 같아지도록 변화시킨다. 현명한 히브리인 솔로몬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그라고 선언하였다. 찬도갸우파니샤드는 우리가 생각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대로 되어진다. 그러나 지성만으로는 지상아와 같은 모습으로 쉽게 형성되어질 수 없다. 차가운 강철은 단단하여 그대로는 작업할 수 없지만, 용광로 속에서 달구어지면 흐르는 유체가 되어 원하는 어떠한 모양으로도 될 수 있듯이, 지성도 그러하다. 지성은 헌신의 불속에 녹여져야 하며, 그러면 신Beloved과 동일함속으로 빠르게 형성되어질 것이다. 같은 등급사이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그 사랑이 강하고 진실하고 오래 계속되면, 서로의 동일함 속으로 녹아든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비슷해지며, 친한 친구끼리는 서로 유사함이 자란다. 상위에 있는 존재를 향한 사랑은 보다 강하게 머물수 있도록 그 변형의 힘을 단련하며, 그가 가슴에 간직한것과 유사하게 변화하려는 본성을 쉽게 형성한다. 

헌신은 새로운 까르마를 만드는 것을 방지한다. 그리고 과거의 까르마가 소진되면 헌신자는 자유롭게 된다. 성바오로는 더 이상 그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그의 안에 살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 말은 그들이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완전한 복종으로 이끄는 그들의 헌신으로서 헌신자들에게 진실이 된다. 그들은 그들의 육체가 그들의 것이 아니라, 세상을 돕기위한 그들의 주에 의해 이용되는 도구로 생각한다. 모든 그들의 행위는 신Beloved을 위한 의무로서 행해진다. 그들은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그들 주의 도구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지키기위해 먹는다. 그들은 생각의 즐거움을 위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일이 더 잘 되게하기 위해서 생각한다. 헌신자들은 그들의 생명을 그들이 보다 상위의 생명과의 합일속에서 사랑하고, 생각하고, 일하고, 행위하는 바로 그 생명속으로 합치며, 그들 존재의 좁은 통로를 더욱 큰 흐름속에 합치며, 보다 풍만한 생명의 일부임을 느끼는속에서 깊은 행복을 찾는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있다. "그대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가 먹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가 바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가 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가 내핍을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 쿤티의 아들이여, 나에 대한 바침으로서 그것을 행하라. 그러면 선과 악의 과실을 생기게 하는 행동의 영향력으로부터 그대는 자유로워질지니"(바가바드기타, ⅸ. 27, 28) 행위의 성과를 바라지 않는 곳에, 오직 희생으로서만 행동이 취해질때, 행위자에 의한 까르마가 생성되지 않으며, 그는 까르마에 의해 생과 사의 윤회의 수레바퀴로 되튕겨지지 않는다. 

헌신은 가슴을 정화한다. 스리 크리슈나는 처음 들으면 이상한 말로 우리를 가르친다. "아주 큰 죄를 지었더라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에게 온다면, 그는 역시 옳다고 간주되어야 한다." 왜? 우리는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올바르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 빠르게 그는 의무적이 되며, 영원한 평화에 이르게 된다" (바가바드기타, ⅸ. 30, 31) 상위의 세계에서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동기에 의해서, 외부적인 표시가 아니라 내부의 자세에 의해서 심판받는다. 지고의 존재에 대해 헌신을 느낄 때, 우리는 악을 등지고 최종목적지로 얼굴을 향한다. 우리는 비틀거릴 수도, 헤매일 수도, 심지어 떨어질 수도 있으나, 우리의 얼굴은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고, 우리는 고향쪽으로 가고 있다. 헌신의 힘은 우리를 착실하게 한다. 신Beloved과의 합일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합일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신속히 버린다. 전지한 존재에게 우리는 우리가 올바른쪽을 향해 서있을 때 옳다. 사랑은 우리가 사모하는 존재를 가리는 악을 태워버리고 우리자신의 내부에 우리가 숭배하는 동일성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너무 확실하고, 그 법칙은 침범될 수 없는 것이어서 우리는 "옳은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는 자아의 추구자로부터 진아의 추구자로 바뀌었다. 

헌신은 고통을 종결시킨다. 우리는 즐거움을 가지고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하여 행하며, 고통은 신Beloved을 위해 인내할때 기쁨속으로 합쳐진다. 세속적인 사랑을 하는 자는 그의 연인으로부터 인정을 얻기 위해서, 또는 그녀를 위해 어떤 탐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기꺼이 고난과, 위험과, 수난을 견딜 것이다. 진아의 아름다움을 흘끗 본 사람들은 즐거이 그들을 합일의 가까이로 가져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한다. 사랑하는 존재와의 합일을 제약하는 모든 것을 그들은 심지어 기쁨을 가지고 기꺼이 희생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 존재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불편함을 견디며, 안락함을 희생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존재의 존재사실이 주는 기쁨은 우리를 서로 갈라놓는 장애물을 극복하는데 마력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헌신은 어려운 일을 쉽게하고 고통스러운 것을 기쁘게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화시키는 연금술사이다. 

헌신은 평화를 가져온다. 진아의 평화속에 있는 가슴은 모든 것과 함께 평화속에 있다. 헌신자들은 모든 것 - 신Beloved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그들 주위의 모든 형상 - 속에서 진아를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모든 사람의 얼굴 뒤에서 진아가 웃음을 짓고 있을 때 그들을 증오하고 경멸하고 배척할 수 있겠는가? "현자는 배움과 겸손으로 치장한 브라마나나, 암소, 코끼리, 그리고 개와 개먹는자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눈으로 바라본다" (바가바드기타, ⅴ. 18) 아무것도 그들 주의 품 밖에 있는 것은 없기 때문에, 누구도, 아무것도 헌신자들의 가슴의 바깥에 있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사랑하는 자에 의해 접촉되는 바로 그 대상을 사랑한다면, 신Beloved이 살고 있는 모든 형상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놀고 있는 어린이의 웃는 얼굴은 끔찍한 가면으로 가장할 수 있지만, 어머니는 가면밑에 아이가 있음을 알고 있다. World-lila(?)에 있을때나 유희할때, 주는 불쾌한 형상아래 숨어 있으며, 헌신자들은 불쾌해하지 않고 단지 신Beloved을 본다.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주를 잃어버리고 사는 창조물은 아무도 없으며, 지독한 죄인의 가슴속에도 거룩함이 머무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출발점으로 되돌아와서 동료창조물을 향한 헌신자들의 자세에 의해 헌신자들을 인식하는 것을 배운다. 그들의 풍부한 사랑, 그들의 부드러움, 동정심, 연민, 모든 신앙 및 사상과의 공명, 이것들은 그들이 사랑의 주를 사랑하는자임을 나타낸다. 스리 라마누자차리야는 그의 구루에게서 한번은 만트라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만일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무슨일이 일어날까하고 구루에게 물었다. "그대는 죽을 것이다" 라는 것이 대답이었다. "그러면 그것을 듣는 사람에게는 무슨일이 일어납니까?" "그는 자유롭게 될 것이다" 그러자 헌신자 스리 크리슈나는 내달려가서 탑꼭대기로 올라가, 그 자신에게 어떤일이 일어날지는 개의치 않고 단지 다른 사람들이 죄와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면서 아래에 있는 군중들을 향해 만트라를 외쳐댔다. 여기에 전형적인 헌신자가 있으며, 사랑하는 자는 신Beloved의 동일함속으로 변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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