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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삶 [헌신의 길] 형상속의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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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주나무 댓글 0건 조회 2,241회 작성일 16-07-30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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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형상속의 생명 



어떤 주어진 우주속에서 신의 생명은 형상들의 향상적인 계열을 통한 많은 생명들속으로 진화한다. 생명은 에너지로서 현현하며, 형상에 의하여 드러나고 더욱 계발된다. 생명이 계발되기 위해서는, 형상들을 계속하여 바꾸어야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형상은 처음에는 수단이 되지만 나중에는 속박이 되기 때문이다. 비록 생명 - 나무가 보이지 않는 뿌리로부터 분리될 수 없듯이 신의 생명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 속의 잠재적인 힘이 주변환경의 작용에 의해 표출되기는 하나, 유용한 탈것이었던 형상은 생명을 속박하는 틀이 된다. 생명은 형성된 형상에 의해 질식해 소멸할 뿐 아니라 형상은 조각조각 분해되어 더 높은 형태의 태아의 형상속에 생명을 놓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생명은 소멸하지 않으며 영원하다. 그래도 형상은 분해되어야 한다. 언제나 확장발전하는 생명을 중심으로 한 형상계열의 분해는 진화를 의미한다. 

이 생명의 확장은 씨앗속의 생명의 확장 - 세포핵에서 눈으로, 눈에서 묘종으로, 묘종에서 묘목으로, 묘목에서 자신이 자라온 것과 같이 씨앗들을 생성해낼수 있는 나무로 - 에 비유된다. 모든 성장은 숨겨진 힘들의 펼침이다. 그 힘은 그 우주 - 그의 우주 - 에 관해서는 로고스 안에서 그의 가장 높은 부분이 닿아 있는 힘, 신이 모든 분리된 생명의 씨앗으로서 심은 힘들이다. 물이 언제나 그 자신의 수준으로 올라오듯이, 흘러내린 이 생명도 그 근원의 수준으로 올라가려 노력한다. 물질이 물질을 끌어당기듯이, 현현속으로 분리되어진 각각의 생명도 신의 생명을 찾는다. 그 신의 생명은 중단이 없이 위로 향하는 힘을 발휘한다. 각각의 미발달한 자아는 신의 자아에 응답하며 많은것중의 신, 그 자신인바의 신에 도달하려고 맹목적으로 애쓴다. 

그 다음에 외부의 접촉이 일어난다. 형상은 큰 자아의 내부를 향한 재촉과 만나, 매달리거나 충돌한다. 끌어당기는 힘은 모든것속에 있는 하나의 진아(대아)이다. 기쁨, 고통의 다양함이 형상속에 있다. 

더 나아가, 한 형상속에 있는 생명은 다른 형상속에 있는 생명을 찾는다. 그러나 형상은 다른자의 형상만을 찾으며, 그것이 그를 방해한다. 형상은 생명과 생명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다. 그들은 섞일 수 없으며 상호 배타적이다. 생명과 생명은 두개의 강이 만나 강물을 섞듯이 섞일 수 있지만, 강이 각자의 둔덕을 지날동안은 서로 합칠수 없는것처럼 생명들도 형상이 각각의 생명을 그 자신의 울속에 가두어 둘 동안에는 합쳐질수 없다. 

생명의 미궁을 통과하여 슬픔을 극복할수 있도록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한데 아울러보자. 


한 존재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분리된 생명으로 인한 갈망은 필연적이다. 

행복을 지속적으로 추구한다. 

행복의 본질은 욕망하는 대상과의 합일이다. 

신의 생명은 일시적인 많은 형상을 통하여 진화한다. 

각각의 분리된 생명은 그 자신인 바의 이 신의 생명을 추구하며, 
그러므로써 형상들이 접촉하게 된다 

형상들은 서로 배척하며 형상속에 담겨진 생명들을 갈라놓는다. 


이제 슬픔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 수 있다. 영혼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아름다운 형상을 찾는다. 영혼은 형상과 결합하고 그것을 즐긴다. 그러나, 형상은 사라지고 공허가 남는다. 영혼은 사랑을 추구하며, 사랑스러운 형상을 찾는다. 영혼은 형상과 결합하여 그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한다. 하지만, 형상은 사라지고 가슴은 고독해진다. 

그러나, 형상과 결합하고 다시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조차, 포만, 어렵게 얻은 전리품을 포기하는 일, 환영의 뒤를 따라서 오는, 하지만 언제나 새로운 환영과 언제나 반복되는 혐오를 수반한 환영 보다는 덜 고통스럽다. 

세상을 살펴보면 통상의 진화에서 오는 모든 고생은, 변화하며, 죽어 없어질 형상과의 결합으로 인한것이라는 것을 알게되는데,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지속적인 행복을 찾기위해 소멸하는 형상에 매달린다. 이것이 기타에서 말하는 "출생과 연결된 기쁨"이다. 그것들은 싫증, 잘해야 사망에 이르기 때문에, 참으로 "고통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진아(대아)의 더없이 행복한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 생명이 큰 생명을 찾도록 하면 행복으로 이르는 길을 찾게된다. 자아가 진아를 찾도록 하면, 평화를 향해 감아올라가는 길이 그의 앞에 나타난다.형상과의 합일에 의해 행복을 찾고자 하는 것은 덧없음, 유한, 대립에 살고 있는 것이다. 큰 생명과의 합일에 의한 행복을 찾는 것은 영원, 무한, 조화위에서 평화스럽게 쉬는 것이다. 

그것이 마치 우리가 기쁨과 아름다움의 생명을 벗기고, 그들을 한없는 깊이와 공간속에 쓸쓸하게 남아 있도록 만든 것으로 생각되는가? 그것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 안에서 사랑하는 것은 형상이 아니라 생명이며, 육체가 아니고 영혼이기 때문이다. 총명한 사랑은 죽음의 심연과 탄생의 레테의 강(망각의 강)을 가로질러 뛰어 넘을 수 있고, 새롭고 낯선 형상이 보석과 같은 영혼을 위한 작은 상자로 주어진다해도 틀림없이 그 자신의 것을 찾고 놓지 않는다. 이것을 볼 때, 슬픔의 원인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형상이 아닌 생명을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의 생명(형상이 아닌)과 결합한다. 사랑이라는 법의 자비로운 엄격함에 의해 형상들이 조각남에 따라 우리는 그들과 점점 합치게 된다. 결국 우리는 둘이 아닌 하나임을 발견하며, 그 하나는 모든 것 안에, 주위에 그리고 통하여 있는 큰 생명과 하나이다. 분리의 한가운데 있어도 우리는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의 고통은 끝나게 된다. 이것이 슬픔의 종결이며, 평화의 시작이다. 

더욱이, 지복으로 가는 길위에서, 슬픔의 원인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슬픔의 격통을 없앨 수 있다. 단지 "처음에는 독과 같으나 나중에는 넥타르 같은" 행복이 베일로 가려지기 때문에 그것이 가혹하게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앎으로부터 마치 끝이 보이는 것처럼 견딜 수 있고 "불속에서 주를 영광되게 할 수" 있는 강한 평정이 솟아나온다. 황금을 가치있게 만드는 불속에서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슬픔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강인함을 개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훈련이 없이는 더이상 육체적인 근력이 강해지지 않듯이 강한 정신과 도덕적 근력은 분투적인 훈련없이 얻어지지 않는다. 투쟁은 사실상 낮은 진화상태이며, 그것은 강인함이 개발되는 것을 뜻한다. 완전한 강함만이 조용하다. 

만일 슬픔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동점심은 진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난에 의해 고통과 그 필요성, 요구와 어떻게 그것을 만날지에 대한 이해를 배운다. 유혹받아봄으로서 유혹받는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도울수 있는가를 배운다. 떨어짐에서 올라와본 사람만이 다만 무례하지 않게 정교한 이해를 가지고 타락한자를 도울수 있다. 모든 고통의 꽃봉오리는 힘의 꽃으로 핀다. 누가 구세주를 낳는 단시간의 산고를 꺼려할 것인가? 

슬픔의 경험이 없이 선과 악의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지고에 대한 의식적인 선택이 없으면, 확신을 할 수 없게되고, 형상과 결합하려는 욕망의 뿌리를 근절할 수 없다. 완벽한 존재의 낮은 본질은 더 이상 감각들의 기쁨을 동경하지 않으며, 강하게 제어하고 있다. 그렇게 완전해진 존재는 그들의 낮은 본질로부터 감각들 고유의 성향들을 제거하였으며, 그것을 그들과 완전히 조화스러운 합일(요가)로 가져왔다. 그들은 인력이나 척력에 영향받지 않고 낮은 세계를 지나가며, 그들의 의지는 변함없이 가장 높은쪽을 향한다, 힘들이지 않고, 모든 법칙의 불가침과 모든 지성적인 적응력의 융통을 가지고 일한다. 수백번의 윤회나 수백만년의 시간도 그러한 사람을 만드는데 별로 많거나 긴 것이 아니다. 

슬픔의 거친 폭풍속에서, 고통이 아주 큰 부분을 작용하는 진화의 이들 초기 단계들은, 단지 초기 단계임을 잊지말자. 그들은 우리 존재의 극히 일부분이며, 두 가지는 같은 표준으로 잴 수 없는것인데 어떻게 시간을 영원에 비교하며, 수백만년을 끝이 없는 생명에 비교하여 측정할 수 있을 것인가? 초기의 병으로 가득찬, 인류의 유아기로서 환생의 주기를 말한다면, 우리는 "순간일뿐인, 더 많은 진보와 영광의 영원한 무게를 위해 우리를 위해 작용하는 가벼운 역경"에 대해 그 상대적 중요성을 과장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폭풍으로 어두워질 때, 폭풍뒤에 있는 변하지 않는 하늘을 보라. 큰 파도가 칠때, 눈을 들어 영원한 해안선을 보라. 우리를 압도하는 가장 격심한 힘도 단지 우리를 위로 들어 올릴것이며, 앞으로 전진케 할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지 않으며, 죽지 않으며, 일정하고, 변하지 않고 영원하며, 단지 불멸의 봉사 - 완전한 자유인 봉사 - 를 위한 형태를 꾸며내기 위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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