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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과 그 메카니즘 [혼과 그 메카니즘] 1장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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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주나무 댓글 0건 조회 2,780회 작성일 16-07-30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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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961, Vote: 3, Date: 2005/01/27 14:18:17 , IP: 220.93.126.13
글 제 목 [혼과 그 메카니즘] (The Soul and its Mechanism) 1장 도입
작 성 자 문성호




혼과 그 메카니즘: 1장 도입 

제1장 도입 


이 책을 쓰게 된 데에는 세 가지 바램이 있었다. 첫째로는 유물론적 또는 현상계의 심리학과 내성적 또는 내면계의 심리학을 결합시키려는 바램이고, 둘째로는 과거의 과학적 심리학을 인류의 사고와 인류의 심리학이라는 더 넓은 영역에서 보기 때문에 물질주의적인 서양과 내성적인 동양을 조화시키려는 바램이고 마지막으로 이들이 대립하는 것이 한 가지 진리의 여러 국면들이며, 이들이 함께 하나의 현실을 구성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싶은 바램이다. 

이 바램들은 현재 세계적으로 심리학적 교육 수준에서 나오고 있다. 오늘날 지배적인 심리학의 형태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철학의 저택들The Mansions of Philosophy”에서 윌 듀런트가 잘 요약하고 있다. 

“우리가 본 것처럼 사람을 연구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환경과 더불어 외부에서 시작하여, 적응 메카니즘으로 사람을 설명한다. 그것은 사상을 사물로, ‘마음’을 ‘물질’로 환원하고 스펜서의 변장한 유물론과 왓슨의 행동주의로 귀결한다... 또 다른 방식은 내면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환경을 연구하고 사용하고 정복하려는 필요, 충동 그리고 욕망 체계로 사람을 본다. 그것은 사물을 사상으로, 물질을 마음으로 환원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그것은 (내면의 목적이 모든 형태를 결정한다고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텔레키(질료가 형태를 얻어 완성하는 현실)’와 더불어 시작하고 베르그송의 생기론Vitalism과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로 귀결한다.” 윌 듀런트, 철학의 저택, p. 257 


W. B. 필스베리는 이 이중적인 체계는 불필요하게 중복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행동주의적 이론을 취하면, 우리는 두 가지 심리학, 즉 내적 심리학과 외적 심리학을, 다시 말해 외부로부터 고찰한 심리학과 내부로부터 고찰한 심리학을 연구해야 한다. 이것은 기껏해야 불필요한 혼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필스베리, W. B. 박사, 철학사, p. 298. 


이 중복된 상황을 인식하면서, 그리고 두 가지 노선의 해석이 불필요하다는 필스베리 박사에 동의하면서 나는 두 가지가 제 삼의 단일한 것으로 융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래서 나는 기계론적 학파의 정당성과 마찬가지로 내성주의적 학파의 입장도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가정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두 학파 모두 사실들을 통일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각 학파는 진정으로 상대 학파를 보완해 준다는 것을 보이려고 한다. 그런다면 서양의 정확한 지식과 동양의 내성적인 지혜에 기초하는 제 삼의 합성 학파가 세워질 수도 있다. 

이들 두 심리학파를 고려해 보면, 현대 심리학이 대부분 물질주의적이면서 매우 대중적인 학파라는 것이 분명하다. 유럽과 미국의 많고 다양한 학파에서 나온 심리학에 대한 최근의 책들을 연구하면, 대다수가 행동주의 학파의 기계론 철학을 승인 또는 거부하는 데에 주된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그렇지 않는 경우라면 또 다른 형태의 물질주의적 심리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볼프강 쾰러는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때는 어떤 태도를, 이후에는 또 다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 세속인의 믿음이다. 또한 대부분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는 한 가지를 하고 이어지는 다른 상황 아래에서는 분명히 다른 일을 하는 성향이 있는 이유를 그는 직접 알고 이해한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동적인 맥락, 즉 정신적인 삶을 구성하는 발전 과정에서 진실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있다. 이 믿음에 반해서 그리고 그와 완전히 이질적으로 현재 매우 학식있는 심리학자의 관점들이 제시되어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어떤 때는 이 일을 하지만 다른 때는 다른 것을 하는 성향이 있다. 왜냐하면 첫 번째 경우에는 어떤 신경 경로들이 활기를 띄는 것이고, 두 번째 경우에는 다른 경로들이 열리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투과성이 좋은 경로들을 지니고 있다!” 볼프강 쾰러, 게슈탈트 심리학, p. 349. 


그러나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고, 윌 듀런트가 말했던 것처럼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과 욕망에 대한 이해를 시작하지도 못한 상태이며, 조절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없다. 거기에는 신비주의와 형이상학이 뒤섞여 있으며, 정신분석, 행동주의, 성적인 신화와 사춘기 질병이 혼합되어 있다.” 윌 듀런트, 철학의 저택, p. 376. 

심리학은 신경이건 원자 또는 생기이건 에너지, 힘, 에테르 파동, 그리고 전류와 전하, 리비도라고 하는 심리학자들의 자유 부동력(freely floating force)이라는 단어들로 위엄을 갖춘 불가시적인 경계 지대에서 방황하고 있다. 모든 과학들은 규정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이와 같은 비인간의 거주처로 수렴되는 것처럼 보인다. 장막이 들어 올려지면 인간의 꿈과 열망으로 이루어진 약속의 땅이 우리에게 드러날 것이다. 불확실성과 기대감은 현대 과학의 확실성과 냉엄한 사실들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마치 인류가 우주적인 무대에 드리워져 있는 커튼 앞에 서서 지성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다음 막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인류가 오랜 과거를 지녀서 많은 경험을 얻고 지식을 축적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완전히 기대하지 않았던 계시와 발전에 참여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을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기에는 현재의 삶의 장치와 이해가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동안 이 우주적인 무대에서, 그리고 다양한 노선들을 통한 진리에로의 접근 과정에서 사람들은 과학에 의해 알려진 사실들을 정비해 왔고, 향후 가능한 발전을 찾아내고 있으며, 옳은지 그른지 실험과 시험을 할만한 가정에 서서 많은 분야에서 활동을 진전시키고 있다. 인간 지식의 모든 분야의 학도들을 위해 어떤 마음가짐을 갖어야 하는지를 지적하면서 버트란트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정확히 반대가 되는, 발견하고자 하는 소망이다.” 버트란트 러셀, 회의적인 에세이, p.157. 

오늘날의 이러한 과학적 상황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자세는 회의론적인 것과, 불가지론적인 것이겠지만 단호하고 공정하게 탐구하면서 의문을 갖지만, 가정된 사실들이 증거에 유효하다고 증명되는 때 기꺼이 확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열린 마음 가짐으로, 편견없는 다수의 공식화된 진실에서만 하나의 진리가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소심한 소인배만이 신념이 없고atheistical, 독단적이고, 파괴적인 비판을 일삼으며, 빛이 되돌아 오고, 새날이 밝아올 때 꼼짝하지 않는다. 

이 탐구, 물음, 과학적인 태도와 연구는 특별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식분야지만, 아직도 진정한 과학적 연구 분야로 들어 가고 있는 중인 가장 신생의 심리학에 적절하다. 더 많은 것이 알려질 때까지 의견을 보류하여 특별한 학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이 분야를 고찰할 때에만, 탐구자는 시야가 제한되어 고립된 관점으로만 보고 자신이 놓여 있는 광경을 보지 못해서 완전한 단위를 이루지 못한 단편들과 사소함만을 다루는 위험을 회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시기의 가장 바람직한 징후들 중 하나는 동양적 관점에 대한 이해와 이를 연구하려는 경향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동쪽과 서쪽은 대단히 다르고 진리에 이르는 접근법이 다르기 때문에 학도들은 최근에서야 비로소 그들의 기본적인 통일성의 가능성을 숙고하게 되었으며, 사람과 그 환경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삶의 동양적 해석과 서양적 해석의 융합으로부터 출현하게 될 것이다. 낡은 해석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고, 고대의 진실이 수립될 것이다. 낡은 오해는 오류로 인식될 것이지만, 현실은 보다 분명한 빛과 아름다움을 발할 것이다. 서양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구조의 이해에 기초해서 이들이 지닌 것과는 다른 과학, 사상 그리고 추론이 결합되고, 구조를 움직이고 이끌어가는, 동양에서는 친숙한 에너지 또는 영혼의 이해에 기초하는 새로운 심리학이 나타날 것이다. 구조와 동력은 적대적이지 않고, 서로 의존하고 있다. 그들은 본질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다. 

서양 심리학은 우선 구조에, 즉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인 우주, 그리고 그 세계에 대한 사람의 객관적 반응에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사람을 활동하는 육체로 다루고, 자연의 역학mechanics과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역학이며, 시험과 실험을 할 수 있는 것만을 다룬다. 그것은 몸을 연구하여 감정과 정신력을 설명하고, 이른바 혼에 대해서도 몸으로 설명한다. eb런트는 이러한 태도를 다음과 같은 말로 지적하고 있다. “자아 또는 혼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유전적인 성격과 획득된 유기체의 경험의 총합일뿐이다.” 윌 듀런트, 철학의 저택, p.75. 

이것은 다양한 유형과 기질을 메카니즘으로 설명한다. 루이스 버먼은 자신의 흥미있는 책에서 이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가장 값진 지식은 그가 내분비선으로 이루어진 생물이라는 것이다. 즉, 특이한 유기체로서 인간은 구성 부분들을 조절하는 많은 세포 공장의 산물, 부산물이다. 이것은 마치 자동차 공장의 부서들이 차의 부품들을 만드는 것과 같다. 이 화학 공장들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고, 몸을 구성하는 다른 세포들에 작용하는 특별한 물질들을 만들어서 이른바 생명이라는 무수한 과정들을 조절하고 결정한다. 생명, 몸 그리고 혼은 조용한 화학 공정에서 이루어지는 신비한 분비물의 활동에서 출현하는데, 이것은 주석염의 용액에서 시작되는 화학 반응에서 전류에 의해 주석 결정수가 나오는 것과 동일하다. 

사람은 내분비선에 의해 조절된다. 5만년 동안 사람은 자신을 정의하고 알려는 노력을 해 온 뒤에 1920년대에 진입해서야, 위의 사실을 자신에 대한 진실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심오한 결론이지만, 많은 사실에 의해 지지받는 분명한 결론일 뿐이다.” 루이스 버먼 의학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들, p. 26. 


서양 심리학은 물리적인 것과 가시적인 것을 강조하며, 선택하는 분야가 과학적이다. 그것은 환상적인 신비가의 태만하고 몽상적인 추측을 체질적으로 싫어한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사람과 그 행동 그리고 자질에 대한 진실을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사실들에서 몸을 분리시켜 버렸다. 이 지식은 더 섬세한 인종에게 작용할 수 있는 메카니즘을 만드는 데에 매우 가치있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보다 극단적인 학파들의 경우에 서양 심리학은 육체의 세포와 기관들의 작용에 감정, 사고 그리고 활동을 모두 연관시키기 때문에 매우 결정론적이다. 그러므로 자유 의지는 주로 유기체, 신경 장치, 그리고 내분비계에 의해 지배된다. 다음의 인용은 이러한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행동주의자의 관점에서 본 심리학’에서 왓슨은 ‘감정은 전체적으로는 몸의 메카니즘이지만, 부분적으로는 내장과 분비계의 큰 변화를 포함하는 유전 유형 반응pattern-reaction’(p.195)이라는 점과 ‘생각은 언어 메카니즘의 움직임’(페이지 316)이라는 점, 그리고 ‘고도로 통합된 육체적 활동일뿐’(p. 325)이라는 점을 가르치려고 했다. 또한 그는 ‘우리가 내재적인 육체 과정을 연구하는 경우에 생각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르면 왓슨은 대뇌 피질의 해당 부위에서 일어나는 활동과 사고를 동일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언어 활동을 할 때 음성 도구, 횡경막, 손, 손가락, 눈의 움직임 등, 말하고, 쓰고, 동작하는 것과 명시적으로 묵시적으로 관련되는 모든 육체 과정과 동일시한 것이다.(p. 324). 머톤 프린스, 1925년의 심리학, p.208 


“심리학은 세계와 그 속에 있는 사람을 함께 연구한다. 즉 그것은 경험을 신경계에 종속된 것으로 연구하지만, 반면에 물리학은 경험을 신경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연구한다. 심리학은 그러므로 일반 과학들과 함께 마음의 일반적인 특성들을 드러내는 학문 분야로서 분류되어야 한다. 이에 의하면 마음은 ‘신경계에 의존한다고 생각되는 인간 경험의 총합’으로 정의된다...심리학은 (인간) 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순간에만 존재한다고 보는 전체적인 환경을 연구하는 반면, 물리학은 (인간) 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순간을 넘어 존재한다고 보이는 전체 환경을 연구한다. 월터 S. 헌터, 1925년의 심리학, p.95. 


“세 번째로 기계론자들의 믿음은 우리가 조심스럽게 구분해야 하는 두 가지 가정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참이라고 해도 다른 하나는 잘못된 것이다. 이 두 가지 가정은 (1) 세계의 모든 과정들은 기본적으로 한 가지 종류로만 이루어져 있고 (2) 이 모든 과정들은 자연을 무기적으로 해석하는 경우에 물리학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것이다. 즉 기계적이거나 엄밀하게 결정되고 그래서 엄밀하게 예측가능한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윌리엄 맥도걸, 1925년의 심리학, p.303. 


루빈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개체의 육체적 모습, 심령적 성격, 또는 혼의 과학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은 다양한 분비선의 내분비물의 성질과 총량에 의해 대개 증명된다.” 허먼 H 루빈 의학박사, 인간의 신비한 분비선들, p.54. 


어떤 학파들은 의식 일반을 부정하는 데에까지 가서 이를 물질에 고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양적 연구자는 그들이 정확하게 보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리어리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의식이 신경을 특징짓는 것은 파동이 물질의 형태를 특징짓는 것과 같다.” 다니엘 H. 리어리 철학박사, 현대 심리학: 정상과 비정상, p.116. 

그래서 의식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정의된다. “말, 그리고 동작 메카니즘과 밀접하게 관련되거나 이를 포함하는 육체 활동의 복합적인 통합과 연속, 그래서 자주 사회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왈터 S. 헌터, 1925년의 심리학, p.91. 


왓슨은 독자들에게 “의식에 대한 언급들, 즉 감각, 지각, 주의, 의지, 심상과 같은 용어들에 대해 설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의를 주고 있다. “이 용어들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연구를 수행할 때, 그리고 학도들에게 학문 체계로서 심리학을 소개할 때면 언제나 그러한 개념들이 없어도 일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을 느껴왔다. 솔직이 그 의미를 모르며, 다른 누구도 일관되게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1925년의 심리학, p.201, 각주 


마지막으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심리학이 심령과 완전히 결별해서 ‘의식’이라는 단어를 대체물, 즉 ‘마음’과 ‘기억’과 함께 살아 있는 것과 함께하는 것으로 만든다. 그때 인간의 행동은 과학적인 기초 위에 세워질 것이고, 문학이나 철학 또는 종교적인 사색의 한 분야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은 개성, 즉 일정한 학식있는 행동을 보여 주는 ‘의식’에, ‘기억’은 개인의 가로무늬근 또는 민무늬근 조직의 일부에서 나오는 신호에 길을 내줄 것이다.” 조지 A. 도시, 우리는 왜 인간처럼 행동하는가, p. 333. 

이렇게 완고한 서양 심리학의 물질주의적 경향은 심리학psychology이라는 말의 어원이 ‘논logos’과 심령psyche 또는 혼soul과 관련되어 있다 것을 기억할 때 더 놀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에는 그러한 입장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들은 내성주의자, 정신주의자mentalist라고 더 잘 알여져 있는 내성적인 심리학파이다. 이들은 의식의 사실성을 인정하고 의식적 실재를 추정한다. 리어리 박사는 이 부류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내성주의자들은 의식, 인식, 인식의 인식, 자아, ‘나(I)’의 심상, 그리고 경직된 훈련과 완고한 기법을 지닌 행동주의자가 경멸, 무시 그리고 부정하는 모든 종류의 개념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 내성주의자는 관심을 내면으로 돌린다. 자아 성찰로부터 자료들을 얻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것을 묻는다. 이론적으로 행동주의자는 인간을 생명의 낮은 형태로 다루기 때문에 동물과 동일하게 다루며, 동물이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행동을 명백하고 객관적으로만 관찰한다. 이는 연구실에서 물체나 화합물의 반응을 관찰할 때 물리학자나 화학자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더우기 주관적 학파는 초이성적이고 체계적인 경향이 있고, 행동주의 학파는 보다 경험적이고 실용적이다... 

“정신주의자들은 심령적 행동이 물리적 행동의 반영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몸과 뇌 이상으로 다른 수준에는 다른 것이 있으며, 이는 원한다면, 마음, 영혼, 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은 물질의 기능이 아니다. 다른 한편 유물론자들은 이와는 다르지만, 그와 반대되는 주장을 한다. 즉 모든 것은 물리적이며, 생각, 느낌, 감정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모든 행동은 모두 물리적, 물질적인 세포의 기능이며, 그러한 구조 없이는 활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리적인 행동이 무엇이건 그것은 작용한다. 한편으로 인간은 육체의 구조를 사용하는 정보력이나 영혼을 갖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불가결하게 복잡하기도 하고, 미묘하기도 하며, 고상하다고 할지라도 도덕이나 종교에 의해 작동할 수 있는 기능을 하는 유일한 구조를 기초로 갖고 있다.” 대니엘 B. 리어리 박사, 현대 심리학: 정상과 비정상, pp. 6-7. 


내성주의자들과 물질주의자들은 그러나 자신의 견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했으며, 이들 학파의 주장은 심리학이 분리되면서, 다양하고 많은 집단들에 의해 훨씬 더 약화되었다. 하바드 대학의 호킹 박사는 말한다. 

“심리학은 정말 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동적 심리학, 목적 심리학, 형태 심리학 그리고 반응 심리학, 프로이드 심리학, 구조 심리학, 행동주의 심리학, 그리고 그 외의 다양한 학파들이 있다. 그들은 자아를 다르게 묘사한다. 그러나 그들의 합은 특징적으로 심리학적 색조를 갖는다. 우리는 행동주의를 순수한 실례로 간주하는데, 그것이 이 성격 중에서 극단적인 예이기 때문이다.” Wm. E. 호킹, 자아 그 몸과 자유, pp.17,18. 

프린스 박사는 광범위하고 일반적인 구분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세 가지 진영으로 나뉘어진다. 자아 심리학자들, 비자이 심리학자들 그리고 중도적 입장들. 첫 번째 집단은 모든 의식적 과정의 내용이 자아, 즉 자아, 자아의식의 인식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모든 의식은 자아에 의해 어떤 것을 의식 또는 인식하는 것이다. 

“비자아 심리학자들인 두 번째 집단은 성찰에 의해서는 어떤 자아나 자아 의식을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와 ‘너’는 언어의 필요에 의해 요구되는 강제된 표현일뿐이다.” 머토 프린스, 1925년의 심리학, p. 223. 


서양 심리학은 대체로 분명히 물질주의적이다. 그것은 기계와 기계 장치의 시대에 번성하는 기계론이다. 

서양 기계론적 심리학자의 입장은 그러므로 확고부동하게 완고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알려진 진실에 기초해서 사실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증명할 수 있고, 자신의 경우들을 인용할 수 있고, 그 자신이 인간 전체라고 주장하는 인간의 메카니즘에 대한 지식이 객관적이고 명백한 결과를 지닌 실험과 시험에 기초해 있다. 

이 물질주의적 심리학에 반대해서 즉시 제기된 비판은 서양 심리학이 주로 비정상적이고 결함이 많고 병적인 케이스만을 배타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이었다. 비범하고 천재적이고 이른바 매우 영적인 개인은 무시되고, 일반인에게 아름답고, 본질적이며, 진실한 많은 것이 설명에서 배제된다. 만약 심리분석가가 그리스도를 분석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여호와 콤플렉스”로 고생하고 있다고 도식화되고 분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용했던 형태의 구조와 “그의 신경계를 특징짓는 의식”의 성격은 여러 시대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었다. 어떻게 그러한 구조가 다시 재현될 수 있었는가? 비슷한 메카니즘을 재생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현대 심리학은 단지 발전의 초입에 머물러 있을뿐이고, 그래서 왈트 휘트먼은 더 큰 영역을 보고 있다. 

“긍정적인 과학 만세! 정확한 증거 만세!”... 

여러분이 보여 주는 사실은 이용할만 하지만, 내가 머물 곳은 아니지, 
나는 그것으로 내가 거주하는 곳으로 들어갈 뿐이라네” 왈트 휘트먼, 풀잎들, p. 10. 


서양에서 독립적으로 출현하긴 했지만 내성주즤자들과 정신주의자들의 모호한 반영일뿐인 동양학파는 서양 학파들과 정반대이다. 동양의 심리학은 형태 뒤에 놓여 있는 것을 다룬다. 그것은 영적이고 초월적이다. 그것은 혼과 영혼을 가정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추론과 결론들이 이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형태와 구조를 완전히 인정하지만, 형태와 에너지를 이용하여 전진시키는 자를 강조한다. 그것은 생명과 에너지의 심리학이다. 

태고의 시간으로부터 이것은 동양의 사고였으며, 인도의 유서깊은 경전, 바가바드 기타에서 분명하게 묘사되고 있다. 

“몸 속에 들어 있는 지고의 영혼은 보는 자, 사고하는 자, 유지하는 자, 맛보는 자, 주님, 상위 자아라고 불리네. 

“모든 감각 안의 힘에 의해 비추어지나 모든 감각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초월적이고, 모두를 지지하고, 여러 가지 힘들로 분리되지 않고 모든 힘을 즐기는 자일세. 

“그것은 미묘함 때문에 모든 존재의 외부와 내면에 존재하며, 움직임 없이, 움직이고, 지각되지 않네, 그것은 떨어져 있지만 아주 가까이 있네. XIII: 22. 14, 15. 

“이 일시적인 몸들은 몸의 영원하고,불멸하며, 무량한 주님에 속해 있도다. II: 17. 

"사람들은 감각력들이 대상보다 더 높다고 말하고 감각력보다 감정이 더 높다고 하며, 감정보다 이해가 더 높다고 하지만, 이해보다 높은 것은 그라네. III: 42.” 

이렇게 동양의 심리학은 원인, 창조자, 자아를 다룬다. 그리고 그 자아가 정신적, 감정적, 그리고 물리적 활동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작은 세계에서 작용하는 인간의 성스러운 자아(divine self: 신아)인지 더 작은 자아들이 모두 살아 움직이며 자아 존재를 지니는 거대한 자아(great Self)인지를 다룬다. 동양의 심리학은 그것의 위대한 논증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자아(the Self)를 알고 있고, 그 앎을 통해 주관적인 진아, 상위혼(Over Soul: 에머슨이 말한 만물을 생성시키는 영혼)과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배출해 왔다. 이 주장들은 그들의 방법을 연구하려는 자와 특별한 훈련을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나 입증하고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동력을 주는 진아, 즉 배후에 존재하고 초월해 있는 영혼 쪽에서 그들의 위치는 형태의 영역에 있는 서양 심리학자의 그것만큼 분명하다. 

이 두 체계의 결점은 명백하고 각각의 경우에 개탄스러운 결과를 만든다. 서양은 메카니즘을 강조하고, 혼을 부정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지성적 힘을 부정하는 경향을 갖는다. 그 때문에 사람의 코구멍 속으로 먼지가 들어갈 뿐 신의 영혼을 드리쉴 수는 없다. 동양은 물리적인 것을 인정하나 그것을 경멸하며, 그로 인해 동양의 비참한 물리적인 조건에 책임이 있게 된다. 이렇게 결함이 심하다면, 이 둘이 결합하면 힘이 나는 것은 진실이 아니겠는가? 

자아(the Self)는 존재하고 (이것은 반드시 증명되어야 한다) 의식적인 신성한 혼이 있다면, 그것이 물리계를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성스러운 결합을 인식할 수 없겠는가? 만약 그것이 지배적인 에너지로 모든 것을 현현시킨다면 (이것은 반드시 증명되어야 한다) 가장 좋은 결과들이 성취될 수 있는 정도로 현명하고 의미있게 그 에너지는 진아가 사용하는 구조에 적응될 수 없을까? 혼의 완벽한 표현이 메카니즘의 매질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도록 형태에 대한 서양의 과학적인 지식과 혼의 본성에 대한 동양의 축적되고 상속된 지혜가 지성적으로 결합될 수는 없을까? 물질이 위로는 마음과 혼과 영혼에 이르고, 향상을 촉진시키는 영혼이 육체를 완벽하게 해서 그것을 증명하면 더 분명하게 밝혀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물질주의적 심리학과 내성적 심리학을 결합시키고, 서양과 동양을 조화시켜서 그 결합이 강력하고 진실되게 하려는 바램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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